[독후감] 토지 제1권 - 박경리
토지 제1권은 1897년 한가위를 지내는 평사리의 가을 풍경을 묘사하는 데서 시작된다. 농촌의 전형적인 가을 풍경,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농민들의 모습을 한 폭의 수채화마냥 잘 그려내고 있다. 그 속에서 벌어지는 사람들간의 이야기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의 삶을 투영(投影)하며 당시 어두운 단면을 드러내고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한다.
태곳적부터 이미 죽음의 그림자요, 어둠의 강을 건너는 달에 연유된 축제가 과연 풍요의 상징이라 할 수 있을는지. 팔월 한가위는 한산 세모시 같은 처량한 삶의 막바지, 체념을 묵시하는 축제나 아닐는지.
한산 세모시. 여름의 전통 옷감이고 수의로 쓰이는 재료. 여름의 막바지, 불같은 자연의 생명력이 다하여 고개를 기울기 시작하고 그에 따른 부산물을 인간이 수확하여 풍요라는 이름으로 보내는 축제, 한가위. 풍요로운 수확을 축복하면서도 빈곤했던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하고 생명을 다했던 이들에 대한 그림자가 너울거리고 그에 대한 추억과 체념을 묵시하는 한가위를 작가 박경리는 한산 세모시를 통해 표현하는 것 같다. 징을 울리고 꽹과리를 치면서 이미 가버린 이들의 설움을 달래주는 듯, 당시 사람들은 한가위를 그렇게 보냈듯 싶다. 그런 한가위의 의미를 우리는 현재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찬바람은 어느 서슬엔가 사람들 마음에 부딪쳐와서 서러운 추억의 현을 건드려주기도 한다.
가끔씩 일어나는 사건들은 때론 우리의 마음에 부딪쳐와 아쉽고 서러웠던 기억을 건드려주기도 한다. 서러움이 깃든 기억을 추억이라 부르기에는 너무도 단장(丹粧)된 표현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어쩔것인가. 서러운 기억도 내가 살아온 삶의 일부이고 추억이라면 추억일터인데...
달빛이었는지 눈물이었는지 아니면 참담한 소망이었는지 모른다.
보름달을 보며 소원을 빌어본 적이 언제였나 싶다. 소원을 빌며 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슬픈 예감 속에서도 달빛 소망을 가져본 적이 있었던가. 참담한 소망은 아닐지언정 내가 이루지 못한 아픈 추억을 가진 슬픈 소망을 기억해본다.
어떤 일에도 감동되지 않을 눈빛, 철저하게 스스로를 소외시키면서 인간과의 교류를 거부하는 눈빛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아닐거라 생각했었다. 나는 잘 웃고 활발하고 이야기하는 것도 좋아했고 사람 사귀는 것을 좋아했다. 나이가 들고 홀로 생각하고 판단해야할 일이 많아지고 사람들에게 상처받기 시작하면서 나의 눈빛은 냉담해지고 스스로 고립시키며 기존의 관계를 경계하고 새로운 관계를 회피하는 사람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힘이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머리를 써서 일을 하기 때문에 남에 뒤지는 일이 없고 그 자신 머슴의 신분임을 똑똑히 자각하여 책임의 한계를 명백하게 지키어나갔다.
타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나는 영어가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여기저기 눈치를 보고 주변머리를 잘 써서 일을 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 티나지 않고 아웃사이더의 상황을 자각하여 넘어야할 선을 넘지 않으며 생존해가는 법을 터득하기 시작했다.
낮에는 햇볕이 포근했었지만 밤바람은 덜미에 싸늘했다.
가을녘 날씨는 항상 이렇다. 낮에는 봄처럼 포근한 날씨지만 밤에는 싸늘한 추위와 더불어 매서운 바람이 냉기를 몰고 올 때가 있다. 어쩌면 가을은 장년이 되어 늙어가는 이들을 보는 이의 마음 한 켠을 보여주는 계절인지도 모르겠다.
긴 그림자가 앞서서 먼저 간다.
난 그림자를 보며 걷는 것을 좋아했다. 그림자가 제멋대로 가고픈 길을 갈거라고 우스꽝스런 상상을 하며 그림자를 멀뚱멀뚱 바라보며 걷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일까? 긴 그림자가 앞서서 먼저 가는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려 이 표현에 정이 갔나보다.
그늘과 빛이 요란하게 움직이며 스쳐 간다.
짙은 어둠 속에서 쏜살같이 숲 속을 뛰어가는 구천이의 모습은 그늘과 빛을 움직이며 스쳐지나가는 바람같이 묘사된다. 세상을 향한 분노와 원망을 여기저기 흩뿌리며 그늘과 빛의 경계를 무너뜨리듯 뛰쳐가는 그의 영혼은 아름답다고 보기에는 너무 처절해보인다.
우중충하게 짙푸른 강물에 하늘이 나직이 내려오고 투박한 잿빛 구름은 약한 빛을 던져주는 해를 가리려 하고 있었다.
토지에 그려진 풍경 묘사는 사진을 보는 것처럼 현실적이면서도 마음 속에 너울거리는 아지랭이처럼 감흥이 올라오게 만든다. 구름 낀 흐릿한 날씨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강가에 서있는 것만 같다.
얼음이 얼기 전의 초겨울은 바람이 없고, 햇빛이 나기만 하면 남쪽 이 고장은 봄날같이 따습다.
예닐곱살 적이었던가. 가슴에 손수건 달고 이슬이 서린 길 따라 조그마한 발자국을 남기고 걸어가던 초겨울 등교길이 생각난다. 남쪽 지방의 초겨울, 아니 늦가을의 아침, 바람이 불지 않고 햇살이 조금씩 돋아나오면서 따습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던 기억.. 그 추억이 새롭다.
노곤하게 풀어진 의식 속에 온갖 일들이 어지럽게 맴돌고 쫓아오고, 떨쳐버리려면 다시 새로운 생각이 거미줄같이 얽혀드는 것이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저녁식사를 하고 아이들을 재우고 해야할 일을 대충 마친 뒤 침대에 눕는다. 노곤하게 풀어진 의식에 잠이 올 것도 같으련만 여러가지 생각들이 고리를 따라 하나둘씩 올라오기 시작한다. 안좋은 기억도 같이 얽매어 올라온다. 떨쳐버리려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면 또다른 생각들과 안좋은 기억들이 얽혀온다. 왜 이러나하고 마음을 다잡아 보건만 마음 속 응어리진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
어질고 아름다운 여인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남자들의 행복이요 여자들은 동경하게 되는데, 남의 경우에서도,
어질고 아름다운 여인의 존재. 어짐이 무엇이며 아름다움이 또 무엇인지 모르겠다. 어짐이란 사사건건 따지지 않고 의견 충돌을 피하며 다른 이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것인가? 아름다움이란 외적인 아름다움인가 아니면 행동을 통해 나타나는 내적인 아름다움인가? 이런 면에서는 작가 박경리도 여성관에 대해서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가졌던 분이신 듯 하다.
아따, 죽은 입에 밥 묵갔소, 눈어덕에 흙 들어가믄 고만이라요. 구신이 어디 있소. 물이라도 떠놓는 것, 그거 다 자식 된 도리고 생전의 부모 은공을 생각해보는 짓 아니오? 내 당대믄 도만이지, 머할라고 이 풍진 세상을 내 자손보고 또 살아달라 하겄소.
난 결혼도 하고 자식을 가진 사람이지만 독신으로 사는 이들이 이런 말을 한다면 100% 공감하겠다. 내 삶 이렇게 살아가면 그만이지 머할려고 이렇게 험난한 세상 내 자식보고 또 살아달라 할 것이고 제삿밥을 차려내라 할 것인가?
내사 머엇을 믿는 사람은 아니다마는 사는 재미는 맘속에 있다 그말이지.
자유로운 인생을 사는 윤보가 용이에게 하는 말이다. 자유로운 영혼, 삶의 재미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도 아니고 티나지 않고 남들 하는대로 따라 사는 것도 아니고, 결국 내 스스로 행복해하는 내 마음 속에 있는 법인데... 그 단순한 것을 우리는 행하기를 주저한다.
개 핥아놓은 죽사발맨치로 생깄어믄
그냥 재미있는 표현이어서 필사해보았다. 잘 생겼다는 말을 이렇게 구수하게 표현한 것이 너무도 좋았다. 아 나는 역시 촌놈일 수 밖에 없구나...
세월은 그를 온화한 성품으로 닦아주었다.
젊을 적 왕성한 혈기로 객기도 부려보고 교만도 떨어보고 성질도 부려보았다. 그 혈기로 인한 어려움도 감당하고 세월을 자각하고 후회와 반성을 거치며 나는 조금씩 넓어진 포용력을 가지게 되었다.
집안은 괴괴했다.
"괴괴하다"는 의미는 쓸쓸할 느낌이 들 정도로 아주 고요하다라는 뜻이다. 아파트에서 혼자 살던 시절, 야간 수업을 마치고 어두운 집안에 불을 켜고 들어설때, 집안은 괴괴했고 그 느낌이 싫어 다시 발걸음을 밖으로 돌리곤 했다.
자기 걸음을 가늠해본다. 몇 발짝 걸어보고는 멈추고 다시 걸어보고, 그렇게 되풀이하면서 행랑 문밖으로 나간다.
내 걸음을 가늠해본다. 문득 내 삶이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해보고픈 마음이 생긴다. 몇 발짝 걸어보고는 멈추고 다시 걸어보고, 그렇게 되풀이하며 내 삶의 굴레바퀴는 굴러간다.
솜뭉치 같은 구름이 뭉게뭉게 피는 하늘은 더없이 평화스럽다.
교사 이오덕의 "우리 글 바로 쓰기"에서 구름을 목동이 몰고 가는 양떼의 모습으로 표현하는 우리나라 소설과 학생들의 글짓기 모습을 비판하는 글을 본 기억이 난다. 자기의 삶을 표현하는 것이 아닌 서양사람 쳐다보는 마음을 심어주는 국어교육의 현실을 안타까워 했던 글이다. 그에 반해 '솜뭉치 같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나는 하늘' 이 얼마나 당시 서민들의 마음을 잘 표현해주는 글인가...
아무것도 더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더 잃지 않으려는 농부들은 또한 아무것도 더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더 잃지 않으려는 자연과 더불어 이 한때는 평화스런 것이다.
아무것도 더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더 잃으려 하지 않는 것. 대자연의 섭리이자 이에 순응하는 농부들의 운명인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더 원하기 때문에 신을 찾고 있는 것인가. 대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면서까지 말이다.
구름도 없는 하늘은 텅 비어서, 다만 들판 쪽으로부터 아낙들의 노랫소리가 메마른 바람에 실리어 들려오곤 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 기분도 청명해져할텐데, 텅 빈 하늘 속에 메마른 아낙네들의 노랫소리가 바람에 실러 들려오는 허망한 평화, 다가올 혼란에 전혀 준비되지않은 평화가 느껴지는 문구이다.
자네는 자네 처지에서만 애길 하는데 지나치면 편견이 되네.
언젠가는 내 자신 스스로에게 그리고 고집센 친구에게 한번 써보고픈 표현이다. 어찌 보면 너그럽고 부드럽게 상대의 편견을 지적해주는 것 같다.
서희의 마음이 자란 것이다. 슬픔은, 다른 아이들에게보다 그에게 더 많은 지혜를 주었던 것이다.
슬픔과 고통은 우리에게 많은 지혜와 깨달음을 가져다 준다. 마음이 자라기 보단 마음이 보다 굳세어져 고난과 역경의 돌부리에 찧여도 그 고통을 견딜 수 있는 내성이 자란 것이다.
달이 없는 그믐밤이지만 수없이 나돋은 별빛에 사방은 희뿌윰했다.
달이 없는 그믐밤, 칠흑 같은 어둠 속 앞 길에 어떤 것이 있을지 몰라 두려움과 불안함에 떨지만 수없이 나돋은 조그마한 별빛은 나에게 다시금 용기와 희망을 복돋아준다.
뱃전에 와서 출렁이는 물살 소리는 먼 저승길을 떠나는 것처럼 허전하고 쓸쓸하게 들리어왔다.
어느 여름밤 바닷가를 홀로 거닐던 생각이 난다. 바닷물이 출렁이며 정박한 배와 부둣가에 부딪히는 소리는 마치 내 마음 속 어두운 그림자를 끄집어내며 현실의 내 모습을 더욱 쓸쓸하고 허전하게 만들곤 했다.
농민들은 변화를 싫어한다. 농민들은 또한 권위에 대한 숭배가 지극한 생리를 지니고 있다.
어디 농민들뿐이던가. 현대 사회 민중의 주류, 서민들 역시 변화를 싫어한다. 그들에게는 하루하루 쳇바퀴 돌아가는 삶 속에서 자신과 사랑하는 가족의 생존을 위해 그들만의 이해관계를 거스르는 모든 변화를 싫어한다. 그리고 그들의 이해관계을 지원해줄 수 있는 권력에 대한 숭배가 몸에 배여 있다.
흔들리는 파초 앞에서 빗방울이 구르며 떨어지고 있다. 시원하고 상쾌한 바람이 얼굴에 닿는다.
시원한 소나기가 쏟아지고 환하게 개인 오후, 시골집 대청에서 바라본 앞 뜰 풍경이 생각난다. 살랑살랑한 바람결에 조그마한 풀잎들이 흔들리며 떨어지는 물방울. 시원하고 상쾌한 바람보다는 무더위에 푹푹 찐, 습기찬 비내음이 얼굴에 닿았던 기억. 8월 한 여름, 시골집에서의 추억이다.
살아야 할 사람이 죽는 것은 개죽음이요, 죽어야 할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은 짐승일 따름
내 존재를 부정했다. 내가 이 세상에 있으면 안될 사람이라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나는 잉여일까, 이 세상의 낭비같은 존재일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어쩌면 죽어야 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라 생각했는지 모른다. 설령 남들이 이것을 개죽음이라 하더라고 그져 살아있던 숨쉬던 그 자체가 싫었던 때였던 듯 싶다.
지나간 고초는 다 꿈과 같고 당장의 고초 역시 보내고 나면 꿈이 될 것이외다. 참으시오.
어차피 이 세상을 마치고 저 세상으로 가면 이 세상은 꿈이 될 터인데 무엇을 더 참고 참으란 말인가. 내 자신만 생각하면 참을 것이 없다. 하지만 사랑하는 가족이 있기에, 사랑하는 이가 나때문에 목에 울음을 삼키고 눈물 흘리는 것을 볼 수 없기에 오늘도 이를 악물고 참아야한다. 그리고 참다보면 나의 마음이 너그러워질 때가 올 것이다.
여인의 눈은 정녕 칼날이었다. 제 목을 찌를 수도 있고 남의 목을 찌를 수 있는
한恨이 가슴속에 맺히고 맺혀 원망을 넘어 절망과 회한이 가슴 속에 가득차면 내 눈에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이 모두 다르게 다가온다. 얼음장같이 차가워진 눈 속에는 그 어떤 것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와 상대방을 향한 적의敵意의 눈길을 가지고 이 세상을 달리다 보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를 곳에 와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햇빛은 물방울같이 공중에서 번득이고 있었다.
한여름 강렬한 햇빛은 치번득거리며 나의 마음을 불태운다. 활활 타올라서 결국은 재가 되어 허망함이 된채로 돌아온다.
물소리 새소리 재잘거리는 것 같고 속삭이는 것 같은 그 소리들을 가로지르며 소쩍새 울음이 간간이 들려온다.
나뭇잎에 찢겨난 조각난 하늘은 새파랗게 보였다.
세상의 모든 것이 평화롭기만 한데 내 마음은 나뭇잎에 찢겨나서 조각조각나버린 하늘 마냥 처량하기만 하다. 내 인생사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어쩔 수 없지만 내가 사랑하는 이의 고통과 슬픔은 가슴 저리도록 나의 마음을 시퍼렇게 멍이 들게 한다.
삽삽한 나뭇잎 썩은 내음이 물기를 머금고 콧가에 와닿았다.
삽삽하다는 표현이 낳설다. 미끄럽지 않고 껄껄하다 즉 꺼칠꺼칠하다라는 뜻이다. 진흙이 뒤엉키고 말라버려 꺼칠꺼칠해진 나뭇잎 냄새는 어떤 냄새일까. 진흙 냄새일까. 진흙에 썩어간 사체의 냄새일까. 그 내음이 죽음의 내음과 비슷한 것일까.
토지 제1권에서 나는 스스로의 존재에 울부짖는 환이/구천이의 마음을, 사랑하는 이의 피할 수없는 운명적 고통에 가슴이 멍들어가는 용이의 절규를, 스스로 이룰수 없는 꿈에 대한 자기 신세의 한탄, 일가친척 조롱과 비웃음에 한을 품는 조준구의 비통스런 마음을 보았다. 어찌보면 내가 그들이 되어 박경리가 적어놓은 그들의 마음을 내 마음대로 찌껄여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문장은 나의 마음을 울리기도 하고 부끄러움에 숨을 곳을 찾게 하기도 하며 나를 위로하기도 했다. 몇 년이 지난 후 또 이 문장을 보았을때는 어떤 마음이 나를 지배할지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세월이 나를 과연 온화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