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토지 제6권 - 박경리
토지 6권에서는 현실을 피해 도망가는 세 남자, 길상, 용이, 상현의 그 후 이야기가 전개된다. 길상은 회령에서 서희와 속마음을 내놓은채 감정충돌을 하고, 회령에서 용정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차사고를 당한다. 그 사고는 결국 길상과 서희을 운명의 끈으로 이어주는 촉매제가 된다. 아들 홍이를 월선에게 부탁한 채 통포슬로 떠나는 용이의 모습에서 왠지 모를 연민이 느껴졌다. 상현은 여전히 현실도피와 자기연민에 빠진 연약한 선비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하동에 남아 '기화'라는 기생이름으로 살아가는 봉순이도 등장한다.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위해 과감한 변화를 택한 그녀를 보며 짙은 공감을 가졌다. 조준구때문에 아버지 정한조를 잃어버린 석이 이야기도 나왔다.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너무도 힘든 상황을 아무말 없이 묵묵히 헤쳐가는 석이의 모습, 그것을 안타까워하는 어머니 석이네, 그 힘듬을 알고 같이 공감해주는 기화. 문득 내 힘든 시간 묵묵히 지켜봐주고 돌봐주고 따뜻한 말을 건네준 가족, 친구, 지인들이 생각났다. 이제는 그 시간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져버린 듯 하다. 오늘밤, 펜을 들고 그 고마웠던 지인들에게 편지를 쓰고 싶은 생각이 들게하는 토지 6권이었다.
평화는 어디 있고 행복은 어디 있고 사랑은 또 어디 있는가, 심장을 쪼개어 바쳐질 그것들은 도시 어디메에 있는가.... 싸움이 있을 뿐이다. 자기 자신과의.
삶의 시간 속에 내 자신과의 싸움만이 있었던 때가 있었다. 다른 것은 신경이 쓰이지 않았던지 존재하지 않았다. 적어도 내 마음 안에서는. 사랑의 환희도, 독립된 가정을 이루는 행복도, 금전에 대한 만족도 없이, 끊임없이 내 자신을 향해 칼부림을 하던 시절이었다.
참으로 여러 해 만에. 밀려갔던 조수가 천천히 천천히 다시 되돌아 온다. 조용하게 슬프게.물 부피는 불어나서 방천벽에 금을 그으며 조용하게 슬프게 올라온다. 충만하고 넘친다.
용이와 월선의 또다른 이별 전, 그들의 감정이 요동친다. 미안함, 후회, 안타까움, 미련, 자신 운명에 대한 한탄, 이 모든 것이 섞이고 섞여 그들 가슴에 휘몰아쳐들어온다.
울부짖던 소리가 멀리서 차츰차츰 꼬리를 감추듯 용이 마음에서 아픔이 사라진다.
마음 속 아픔은 치유되지 않는다. 다만 그 소리가 차츰 꼬리를 감추듯 희미해져갈 뿐이다. 그 희미해진 자국 위에 또다른 상처가 덧칠해진다. 그리고 다시 희미해지고 또다른 상처가 덧칠되고... 그렇게 내 마음은 바래져간다.
피는 흘릴 만큼 흘러야 병은 치유되는 법이다.
마음 속의 피는 흘릴 만큼 흘려도 치유되지 않는다. 다만 무뎌질뿐... 그 무뎌짐을 치유로 착각하는 것이다.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는 것이다. 비로소 상현은 자기 마음속에 난 상처가 얼마나 깊은 것인가를 절감한다.
상현이 양반으로서 타고난 권위의식과 타성을 극복하려면 자신 마음 속에 난 고통을 처절히 절감하고 그 고통에 무뎌져야하는 것일까? 그러한 고통과 울음을 통해 자신의 껍데기를 벗을 수 있는 것일까? 나는 허울좋은 껍데기를 벗었는가 아니면 아직도 벗은 척을 한 것일까?
손님만 보면 기갈 든 사람같이 붙잡는 그들 심리 속에 깊이 뿌리박힌 외로움을 생각해본다. 내외가 함께, 그리고 유복한 살림이건만, 귀화하여 보장되고 약속받은 터전이건만 이민족 속의 우리, 이민족 속의 나, 그 의식이 그들만의 것은 아니다. 흘러온 수만 이곳 조선인들의 사무친 슬픔이다. 늙어 쇠잔해졌고 단신의 김훈장의 경우는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타국에서 이민족 속의 우리를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오직 이민족 속의 나만을 생각했을 뿐. 그러다 가족이 생겼고 이제는 이민족이 아닌 귀화인이 되어버린 나. 그 속에서 나의 정체성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내 딸과 아들의 정체성은 어디로 갈 것인가?
사방팔방이 절망의 두터운 벽으로 둘러싸여져 있다.
기존의 인간관계가 모두 끊겨버린, 아니 끊어버린 상태에서 나는 잠시나마 해방감을 느꼈다. 가족과 보내는 시간에 몰입하면서 사방팔방 둘러싸였던 절망의 두터운 벽에서 탈출한 느낌이었다. 내 나라, 내 고향에 있으면서, 항상 숨이 막히듯한 느낌은 결국 나라는 사람은 내 나라에서 적응할 수 없었던 존재라는 뜻이었나? 아니면 나는 본래 내 정체성을 사방팔방이 다막힌 두꺼운 벽으로 막아버리고 안개숲으로 도망쳐버린 육체일 뿐인가?
사람됨이 잔인해서도 아니다. 고의로 한 말도 아니다. 사람됨이 잔인했거나 고의로 한 짓이라면 미워해버리면 그만이다. 등을 돌려버리면 그만이다.
나에게 악감정을 가진 사람이 아닌데, 내 딴에는 착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그런 사람에게 상처받는 이야기를 들으면 어떻게 대놓고 말을 하지 못하고 속으로 끙끙거리며 괴로워한다. 미운 사람이면, 내 입장에서 볼때 악하거나 잔인한 사람이라면 차라리 등을 돌려버리면 그만이고 잊어버리면 그만이다. 내 딴에는 믿을 수 있었던 사람이 내 마음 속에서 미운사람이 그리고 악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 같아 더욱더 괴로운 것이다.
흔들리는 마차 속에서 때론 절망이, 때론 희망이 교차하는 마음은 끝없이 방황하면서.
버스를 타고 서울에 올라오는 길은 때론 절망이, 때론 희망이 교차하면서 내 마음은 정처없이 방황길을 떠돌았다. 과연 이 선택이 잘 한 것일까 하는, 수많은 후회와 의구심이 나를 괴롭혔지만, 그래도 이 길 밖에 없다는 결연함으로 계속 내 마음을 달래었다.
맥락도 없는 지난 일이 불쑥 솟았다간 가라앉고, 앞일, 지난 일이 뒤죽박죽이 되어 잠 안 오는 안막을 어지럽힌다.
기억 속 너머 희미한 기억이 불쑥 솟아올라 내 마음이 갑자기 괴롭힐 때가 있다. 불쑥 솟아오른 과거의 기억은 현재의 고민들과 뒤죽박죽 섞여 잠못이루는 밤 깊은 한숨을 내쉬게 한다.
마음 바닥에 날카로운 손톱 자국을 남겨놓고, 어금니를 지그시 깨문다.
다른 이가 쉽게 내뱉은 말에 상처 받은 내 마음. 그 마음에 남겨진 손톱 자국은 남겨놓고 나는 어금니를 살짝 깨물며 내 갈 길에 집중하려 애써본다.
감정 자체는 양심으로 봐서는 약점이다.
공적인 일이든, 인간관계를 다루는 일이든, 내 속 감정 자체를 드러내는 것은 나에게 큰 약점이 될 수 있다. 이것을 깨달은 것은 20대가 훌쩍 지나가버린 30대 중반이었다. 20대 혈기에 실수도 많이 하고 약점도 많이 드러내며 나는 다른 이들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주거니 받거니 하였다. 그리고 조금씩 고개가 숙여지는 지금, 스스로 거울을 바라보며 내 자신을 양심으로 볼 수 있는지 생각해본다.
지랄을 하듯 성미를 부리고 나니 속이 가라앉고 오히려 혜관과는 옛적부터 알았던 사이처럼 친숙해지는 게 아닌가
누군가와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했다. 그 사소한 것에 화를 낸 내 자신이 무안하기도 하고 상대방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상대방도 마찬가지 기분이 들었나 보다. 결국 멋적은 웃음과 함께 옛적부터 알았던 동네 친구가 서로 욕하면서 정을 나누듯 친숙한 기분이 들어 마음이 편해지고 만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들어본 적이 언제였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리고 가물해진 기억속에 슬픔이 새벽 안개처럼 밀려온다.
봄이 꼬리를 감추면서 싱싱한 푸르름이 산과 들을 덮고, 밤이면 나무 그림자가 미친 듯 소용돌이쳤었다.
초여름이 되면서 가져오는 모든 생명력이 여성의 농염한 육체와 분위기에 깃들게 되면 밤마다 그를 사모하는 남성의 욕구가 소용돌이친다. 처녀 봉순이 서희와 길상과 함께 용정에 가지 않고 혜관이 있는 절에 잠시 기거하면서 그 곳에 있던 젊은 사미승들 마음을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게 된다. 작가 박경리가 계절 변화에 따라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1930~40년대 근대문학이 일본문학에 영향을 받아서일까? 설령 그것을 부정하지 않더라도 우리 글의 싱싱한 표현을 이렇게 써내려간 작가 박경리의 필력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슴에 봄 아지랑이 같은 것이 몰려왔었고 남모르게 한숨을 쉬곤 하지 않았던가.
처녀 봉순이의 자태는 헤관스님에게도 크나큰 유혹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처자가 있는 유부남도 생명력이 넘치는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에 가슴이 설레지 않던가. 금지된 정욕이라기 보다는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도덕을 지키기 위해, 그 선을 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한숨을 쉬곤 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그 욕정도 남성으로서의 생명력인가? 그 생명력이 이제 희미해져버린 내 자신에 자조 섞인 웃음만 나올 뿐이다.
기와집 처마가 가지런히 도열한 골목길은 오가는 사람이 별로 없어 여전히 조용한 듯했으나 햇볕에 녹아 번지는 눈물,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마음에 어수선하다.
1900년대 근대화의 물결이 흘러들어오는 한양 도성 모습을 생생히 묘사해주는 듯 하다. 점심때를 향하는 아침시간, 양반세도가들이 모여사는 기왓집 담장을 따라 걸어가는 상현과 혜관. 그들을 따라가는 아침 햇살. 그리고 그 햇살을 맞이하는 담장벽과 그 벽에 흔적을 남기는 행인들의 그림자가 눈에 아련하다.
가난한 백성들은 영신환 한 알이라도 소중하게 정성 들여서 먹고, 그 한 알의 영신환 몇 배의 정을 느끼지마는 배부른 사람들은 천하 명약도 정으로 받지는 아니한다. 초봄 들판에서 나물을 캐는 고사리 같은 손은 정에다 정을 돌려줄 줄 알지만 시궁창에 흰밥 쏟아 버리는 아낙은 허기 든 사람에게 식은 죽 한 그릇 베풀 줄 모른다.
왜 이 글이 눈에 밟힐까? 무언가 간절한 마음이 있는 자는 아주 조그마한 호의라 할지라도 몇 배의 정을 느끼지마는 게으르고 배부른 자는 일만금을 줘도 진심으로 고마워하지 않는다. 배부르던 때가 있었다. 그 때는 스스로 자만하여 다른이의 호의를 전혀 고맙게 여기지 않았다. 배고파 서러워 눈물을 흘린 연후에야 조그만 호의에 감복하고 마음 속에 그 정을 깊이 간직하는 법을 배웠다. 나는 배고플때 받은 호의만큼 다른 배고픈 이에게 베풀어주었나. 눈을 감고 스스로 생각해본다. 그만큼 베풀어주었다 쉽게 말하지 못하겠다. 아니 배고파 눈물이 나올 것 같은데 그런 나의 간을 빼먹으려 한 자들의 얼굴이 먼저 생각나는 것은 무엇일까. 아직도 그 한을 극복하지 못했단 말인가.
흐느끼도록 몰아대는 바람 속의 둑길
나는 그 한을 극복하지 못한채 흐느끼도록 몰아대는 바람 속의 둑길에서 묵묵히 물가를 바라보고 있다. 매서운 바람 속에 눈물 한방울이 눈가를 스쳐 날아간다.
웃음소리 - 밀물처럼 다가오고 썰물처럼 멀어져간다.
성공과 실패에 연연해하던 어린 시절. 실패라 생각한 일에 스스로 풀이 죽어 사람들을 피해다닌 적이 있었다. 항상 다녔던 길을 외면하고 길을 돌고 돌아 우연히라도 아는 사람을 만나면 그들 얼굴에 비웃음이 밀물처럼 다가와 썰물처럼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한동안 대인기피증 환자처럼... 아니 환자가 되어 집안에서 숨어지냈었다.
별이 깜박거리고 석이네 마음도 깜박거린다.
오늘도 잠이 오지않는 밤을 꼬박 새버리고 마는 걸까. 무심히 구름 한점없는 밤하늘을 쳐다본다. 별이 깜박거리고 내 마음도 덩달아 깜박거린다. 아득한 하늘 속 반짝이는 별들이 야속하게만 보인다. 나는 왜이리도 약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일까. 내가 싫고 내 주변의 사람이 싫고 이 세상이 싫다. 모든 것과 작별하고 싶다는 마음이 늦은 밤 깜박이는 신호등마냥 내 마음속을 들락거린다.
떠난다는 것은 살아서만 떠나는가, 죽음으로도 떠난다.
잠시 집에 다녀오마 하며 집을 떠났던 남편이 죽어서 돌아왔을때 석이네는 떠난다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기 시작한 듯 싶다. 석이가 관수와 함께 길을 떠나자 불안해하는 석이네. 석이네만 그런 마음이 들었으랴. 인천공항에서 미국으로 홀연히 떠나던 나를 마중하셨던 어머님의 눈가에는 아들이 떠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가득 했으리라. 마치 석이네 마음처럼...
희망이 잡힐 것 같지만 손바닥에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느낌이 두려웠다. 희망이 잡힐 듯 하면서도 손바닥에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기분. 그 희망이 절망이 되어 내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것만 같은 그 느낌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그 희망을 애써 부정하기 시작했다. 희망을 회한과 더불어 가슴 속에 깊이 묻어둔채 말없이 내 갈 길을 가야 했다.
웃음도 말도 허공에 먼지 되어 날아갔다. 무슨 소용인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없는 것이 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불평을 한들 무슨 소용인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내자신에 대한 자조섞인 웃음도, 답답함을 내뱉는 말도 허공에 먼지 되어 날아가고 만다. 결국 이러고 말 것을... 하는 한숨소리와 함께..
세상이 달라지야 하는 기라, 세상이. 되지도 않을 꿈이라 생각하겄지. 모두가 그렇기 생각한다. 천한 백성들은 그렇기 자파하고 살아왔다.
자파(自罷)하다라는 말은 어떤 일을 스스로 그만두다라는 뜻이다. 항상 주변 사람들 탓, 환경 탓, 내가 이렇게 태어난 탓만 하며, 그렇게 탓할 것만 찾아가며 젊은 시간을 보냈었다. 그렇게 탓만 하는 천한 젊은이가 되어 자파하고 살아왔다. 하지만 언제 자파하고 살 것인가. 언젠간 자파의 벽을 깨부수고 나에 대한 진실을 직시한 후 무소의 뿔처럼 길을 묵묵히 가야하는 것을... 그것을 너무도 뒤늦게 깨달아버렸다. 아니 뒤늦게나마 깨달아 다행이었다.
자리꼽재기 그 늙은 전가가 거금을 내던지고 실속도 없는 참봉벼슬을 산 것은 양반이 되어야만 왜놈하고 붙어묵기 좋을 기니께
학위를 돈으로 사고, 교수자리를 돈으로 사고, 정치를 하기 위해 돈을 뿌리는 것은 그렇게 해야만 권력자와 기득권층과 붙어묵기 좋아서일까? 그것을 묵인하며 돈을 쓸어담는 기득권층과 지식인들을 욕하면서도 나역시도 그런 노력을 하는 사람의 대열에 서있는 사실에 구역질이 나왔다.
표정에 순간 칼날 같은 것이 지나간다. 살기하고는 다르다. 날카로운 판단이라 할까 결단이라 할까. 민들레 꽃씨같이 뽀뽓한 선비풍과 딴판으로 위압적이며 교활하기조차 하다.
누군가의 말 한 마디가 칼날이 되어 내 마음에 흠집을 내려한다. 그 흠집을 날쌔게 피하면서 내 표정에는 순간 칼날 같은 것이 지나간다. '아니 이 사람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거지'라는 생각과 함께 어떻게 반응해야할 지에 대한 판단의 순간이다. 순진한 척 아무렇지않게 넘길 수도 있겠지만 다시는 도발하지 못하도록 칼날을 되돌려 후려칠 수도 있는 것이다. 행동의 결과를 생각해보며 빠르게 결단내려야한다. 이 모든 것이 순간의 찰나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앞뒤를 살피며 나갈 길을 강구하지 않는 저돌적인 만용
젊은 혈기를 믿고 저돌적인 만용을 부리던 때가 있었다. 다른 이의 마음을 살피지 않고 오로지 목적과 성취만을 생각하며 앞으로만 가려할 때였다. 사람들로부터 불평도 듣고, 비난도 들으면서 그렇게 밀고 나갔던 이유는 어쩌면 내 개인의 영달과 욕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뒤처질 수도 있는 누군가를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는 어떠한가. 아직도 만용을 부리고 있는 것인가.
사람의 값어치를 안다면 옳은 곳으로 인도할 것이요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선 복종하는 것이 또 당연
일하는 장소를 옮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만일 현재 내가 있는 곳에서 나의 값어치를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그 곳을 떠난 것이 당연하다. 내 값어치를 알아주는 곳이라도 그것이 옳다고 믿고 조직의 성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당연하다. 결국 조직의 성공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좌우되고 지도자의 능력 역시 아랫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나는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을 이렇게 평가해야한다는 것을 배우는데 많은 것을 희생해야 했다.
산봉우리 위에 올라선 것처럼 석이의 결단은 어려웠던 것이다. 석이는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변화는 쉽지 않다. 변화가 쉽지 않은데 자기혁신은 더더욱 어렵다. 타협을 절대 하지 마라면서 쉽게 타협해버리는 상대는 바로 내 자신이기 때문이다. 내 처신에 다가올 큰 변화를 예감한 채 어떤 결단을 내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결정을 내리면서도 현실에 타협하라고 속삭이는 내자신에게 반기를 들어버리는 내가, 내가 알고 있던 내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용정촌과 하동 두 곳에서 전개되는 이야기에 나는 쉴새 없이 책장을 넘겼다. 등장인물의 심리묘사가 너무도 사실적으로 나에게 다가와서일까. 마음에 와닿는 문장을 필사하면서도 가끔씩 울컥해지는 기분은 어쩔 수 없다. 나역시도 한이 많은 사람인 것인가. 토지라는 책은 이렇게 한많은 사람을 위로해주는 이야기인가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