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rram's Life
[독후감] 토지 제8권 - 박경리 본문
토지 제8권을 읽는 것은 쉽지 않았다. 거스를 수 없는 역사와 피해갈 수 없는 죽음 앞에서 무력한 자신의 모습에 번민하는 길상. 나의 됨됨이는 길상이라는 인물 근처에 다다르지 못하지만 고민과 괴로움이 서린 길상의 체념스런 독백에 마음이 아팠다. 최참판댁의 마지막 남은 자손으로서 권위와 재산을 지키키 위한 서희의 외로운 싸움. 스스로 그 외로운 길을 가기로 결정했고 나약함을 절대 비치지 않는 타고난 성격으로 그 외로움은 배가 되었다. 평행선을 달리는 길상과 서희의 동거는 점차 그 괘를 달리 하여 각자의 방향으로 갈 것 같은 실마리를 안겨준다.
월선의 죽음은 바람에 흔들려 꺼질듯 하다가도 다시 살아나는, 처절한 촛불이었다. 그 촛불은 사랑의 촛농이 눈물처럼 흘러내려 용이의 가슴에 굳어버린 듯 하다. 월선이도, 용이도,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사랑을 확인하고, 믿음을 도닥이며 그들의 아름다운 시간을 마무리하는 모습에서 가슴이 찡했다.
환이의 조물주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토로에서 나는 한없는 동질감을 느꼈다. 성현들을 위해 죄인이 되어버린 슬픈 백성들. 그것을 이용해 힘없는 자들에 현실성없는 희망고문을 던지고 착취하는 사람들. 이것은 과거형으로 끝나지 않았다. 아직도 진행형이다. 우리는 그 미래를 바꿀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운명이라는 이름아래 계속 끌려 다닐 것인가.
책 읽기를 멈추고 원치 않는 기억과 한없는 싸움을 해야했다. 망상이라 부르고 싶은 기억. 이제는 보낼때도 되었건만 아직도 가슴속에 남아 나를 괴롭힌다. 아마도 이것이 토지 8권을 쉽게 읽지못했던 이유였을까. 그 마음들을 문장 필사와 더불어 표현해보았다.
가랑잎 같은 인생이다. 해묵은 지푸라기, 으흠...... 십 년을 넘기돌리고 돌린 물레, 내가 왜 이런 비감한 마음을 가질꼬?
20여년이 다되어가는 타국 생활에서 가랑잎 같았던 내 인생을 뒤돌아본다. 그 세월을 넘기돌리고 돌린 물레, 비감한 마음을 가지고 출발했고 이제는 길가에 앉아 지나가는 나그네들에게 눈길을 돌릴만도 하건만 아직도 왜 이런 비감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미소 짓는 사내의 얼굴은 온유하기보다 오히려 그 미소로 하여 싸늘한 냉기를 느끼게 한다.술버릇도 좋았고 단정한 몸가짐에는 잘 훈련된 흔적이 있었으며 평지를 같은 보조로 가듯이 억양 없는 나지막한 음성이었다.
술자리를 해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주 오래전 기억 속 술자리는 감정과 본성이 터져나오고 미소보다는 한탄, 부정한 몸짓과 비틀거림이다. 아마도 한국에 사는 대부분의 서민이 이렇게 술을 마시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함부로 해본다. 내 어릴 적 기억으로는 가끔씩 술자리에서도 단정함과 다정함을 잃지않고 침착함을 유지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은 술자리에서 쉬이 환영받지 못한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사람이 미치듯이 역사라는 것도 때론 미치니까. 예측할 수 없는 일이란 얼마든지 있는 거구. 대체로 그렇게 되는 거 아닐까, 그러니까 예측일 뿐이지.
역사가 미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미치고 그래서 세상이 미치는 것 아닐까? 예측할 수 없는 대중에 세상이 요동치고 시대가 소용돌이치면서 결과적으로 역사가 미치게 되는 것 않은가? 예측할 수 없는 사람 마음이 모이고 모여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노여움도 비애도 아닌데 뜨거운 것이 마디에서 마디로 도약하듯 울컥 치밀고 또 치민다.
술자리에서 갑자기 울컥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노여움도 비애도 아닌데 알지 모를 깊은 곳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나보다. 대부분 그 분노는 바닥에 떨어진 자존감에서 생겨난 자기비애감의 표현이다. 가끔씩 그 분노가 나에게 난도질을 할때면 나는 묵묵히 그 분노를 받아주다가도 넘어가지 않아야할 선을 넘어버리면 냉정한 얼굴로 상대방의 눈빛을 쳐다본 다음 자리를 일어선다. 그리고 그사람과의 연락을 끊어버린다. 이미 스스로 무너지고 있는 사람에게 내가 화를 내봐야 무의미한 일이다. 스스로 무너지는 모습을 멀리서 관망하며 조용히 즐기는 것. 그것이 내가 상대방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복수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100% 선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길상의 뺨을 겨냥하여 우스개의 일격을 가했고 길상의 가슴팍을 겨냥하여 세상을 두루 다녀본 경험담의 난타질을 했다. 미끄럽기가 미꾸라지 같은 말은 모두가 화살이었다.
넉살좋게 입에 발린 말을 하면서 말속에 칼침을 담아 일격을 가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본심을 절대로 직설화법을 쓰지않고 잘 포장해서 전달하는 것은 좋은 커뮤니케이션의 한 방법일까? 체면과 예의를 중시하는 한국사회에서 살아남는데 필수적인 커뮤니케이션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커뮤니케이션을 익히지 못한 자, 결국 쫓겨서 이 곳까지 왔다.
주갑의 얼굴이 새파래졌고 길상은 술상을 엎을 수 없었던 자신을 덫에 걸린 한 마리의 쥐라고 생각했다.
가끔씩 자기 성질대로 분위기를 엎어버리는 사람이 있다. 가족끼리, 회사동료끼리, 친구끼리 모임에서 그런 일이 가끔씩 발생한다. 그 분위기를 엎어버리고 훌쩍 떠나버린 사람 뒤로 남겨진 이들는 어색해진 분위기에 어쩔 줄 몰라한다. 마치 술상 엎어진 분위기 아래 덫에 걸린 한마리 쥐처럼 조용히 숨죽여 있는 것이다.
자각하고 꾀가 생긴 민중은 더 무섭지.
국민과의 소통을 촉진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청와대 국민청원. 이것은 자각하고 꾀가 생긴 민중의 효과적인 무기가 되었다. 자각하고 꾀가 생긴 민중을 나쁘다고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민중으로 인해 엘리트계층과 기득권층이 두려움과 조심스러움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자각하고 꾀가 생긴 소수의 민중이 또다른 엘리트와 기득층이 되어 횡포를 일삼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실상 그네들 알맹이는 소란하지 않고 비굴하지도 않고 아주 자잔하거든. 그네들의 행동이나 태도는 옷과 같은 것이어서 필요할 땐 입고 불필요할 적엔 벗어던지는 게야. 그러니 알몸은 언제나 말짱하지.
권필응 일행과 길상이 중국인의 속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오는 문장이다. 응큼하게 보일만큼 철저히 실리를 따지는 중국 서민층의 속성을 이야기한다.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이전의 중국인은 지극히 실리적이었나 보다. 문화대혁명 이후 중국인은 조금 바뀌었다고나 할까. 실리적인 면은 남아있고 실용주의적인 것이 가미되었기는 했지만 보다 국수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면이 강해진 것 같다. 최근 그들의 행동과 태도는 자신의 처신에 몰입하여 화려한 옷으로 치장하다가 자신들도 근육이 생겼다며 알몸을 보이는 경우가 많아 조금 못마땅스러워 보이는 점도 있다. 물론 이것은 내 주관적인 생각이다.
중간층이 내려앉아 깔리는 만큰 저변은 넓어진다. 이렇게 되면 또 불안해지는 것은 권력층이야.
중산층이 무너져 앉으면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변화에 대한 욕구가 커지게 된다. 변화를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은 변화로 인해 잃은 것이 많은 계층, 권력층과 그 부류에 빌붙어먹고 사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이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은 두가지다. 일정부분 권력을 포기하고 피기득권자들에게 나누어주어 불만을 잠재우거나 외세를 끌어들여 늘어난 피기득권자들을 압박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투표권을 가지고 있다면 어떤 사람들 위해 표를 던질 것인가? 그것은 당신 입장에 따른 당신 선택일 뿐이다.
배신에서 시작하여 배신으로 끝내는 야망.
야망과 욕심은 인간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본성일까? 그것을 위해 윗사람은 아랫사람 희생시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버림받은 아랫사람은 분노를 삭이고 또다른 차원의 배신으로 순환고리를 잇는다. 이렇게 배신으로 시작하여 배신으로 끝나는 야망은 인간사회를 주름지게 되는 것이다.
의심이란 가장 좋은 상태를 선택하고자 하는 조심성이기 때문에, 믿지 않는다는 것은 믿을 수 있는 것을 찾는 욕망이 강하다.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의 역사는 민중이 자각하여 지배세력에게 끊임없이 의심을 품고 배신감을 느끼면 들고 일어나 왕의 목을 내쳐본 적이 단한번도 없다. 오히려 그 의심을 불순한 것으로 보고, 정이 없는 것으로 보아 배척하는 문화가 더 강했다. 왜 그럴까? 가장 좋은 상태를 선택할 수 없고 믿을 수 있는 것을 찾을 수 없다는 자포자기 심정 때문이었을까? 그래서 우리는 의심하는 것을 불경스러운 것이라 여기는 것일까?
눈을 떴지만 몸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술을 마시지는 않았지만 몸이 피곤했던 모양이다. 잠에서 깼다고 생각했다. 눈을 뜨니 어두운 방천장이 보인다. 그러다 다시 눈이 감긴다. 내 몸이 물 속에 잠긴 것 처럼 숨쉬는 것이 부자연스럽다. 허우적거리다 다시 눈을 뜨면 어두운 방천장 그리고 내 책상이 멀찌감치 보인다. 누군가 물속에서 내 몸을 잡아당기는 것 같다. 다시 눈이 감긴다. 알 수 없는 얼굴이 물 속에서 내 어깨를 잡아당긴다. 그 얼굴과 눈이 마주치면서 나는 문득 공포감을 느낀다. 눈을 떠보려 몸부림친다. 마치 물속에서 살아남으려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눈을 떴지만 몸은 물 속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눈 감기가 두려워 몸을 움직려는데 움직여지지 않는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는, 아주 오래전 가위눌린 기억이다.
속박에서 풀려나는 순간의 공허, 공허 속에 어둠이 스며오고, 가득히 스며오고 밤의 침묵이 모난 짐짝처럼 창자를 타고 내려간다. 모서리에 찔리는 통증과 더불어 마음 바닥에 짐짝이 가라앉는다.
몇 차에 걸친 술자리를 파하고 익숙치 않은 곳에서 잠자리를 한 후 새벽녘 터벅터벅 걸어나오는 길거리, 순간의 공허감이 밀려온다. 아직도 어둠이 깔려있는 새벽, 침묵의 기운을 들이마신다. 차가운 공기가 지난 밤 지나치게 마신 술때문에 쓰린 속을 송곳처럼 찔러온다. 그 통증은 이렇게 사는 내 자신에 대한 자책감과 더불어 내 마음 깊숙히 가라앉고 만다. 결국 난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답답함과 속상함이 한데 엉켜 밀려온다.
나뭇가지가 얼기설기 걸려 있는 희뿌연 하늘에 별이 하나 동편 기슭을 향해 떨어진다. 날이 갈수록 애정의 질곡은 뼛속 깊이 몰려들어 가는데 그럴수록 몸을 흔들며 질곡에서 빠져나가는 꿈은 희망봉만큼이나 거대해지는 것. 자승자박의 상태는 바로 그 상승작용의 갈등 때문이다.
질곡桎梏은 수갑과 같은 형구를 뜻하는 옛말이다. 선택의 기로에서 내가 한 결정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깨닫는 순간, 나는 어쩌면 그 결정을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다. 날이 갈수록 애증의 질곡은 뼛속 깊이 몰려들어 가는데 그것을 벗어나려 할수록 더욱더 속박되어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내가 가진 꿈이 무엇이었나라는 의문이 점점 내 삶에서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결국 내속에 있던 허위의식이 이런 잘못된 결정을 내리게 했다는 자승자박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밧줄을 끊어내기 위해 나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인연을 끊어내야 했다.
개갈하지 않은 한 여자는 어느 하늘 밑에서건 버림받은 사내를 생각할 것이요 사내는 또 가끔 고독한 여자의 생애를 묵은 상처처럼, 궂은 날 묵은 상처의 통증처럼 마음 한구석에 떠올릴 것이다.
문득 지난날의 사랑이 떠오른다. 내가 힘들다는 변명으로 그녀를 충분히 공감해주지 못하고, 충분히 사랑하지 못하고, 충분히 알려고 하지 않은 나날이 후회스럽다. 궃은 날 묵은 상처의 통증처럼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아 가끔씩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것은 지난날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아직도 주는 상처인가. 지난날의 내가 그녀에게 준 상처는 어떡할 것인가...
겉으로는 비난한 것 같았으나 따뜻한 마음을 그런 식으로 표현.
나는 어떤 사람인가. 말을 돌려하지 못하고 직선적이어서 가끔씩 친한 이 얼굴에 대놓고 비난하는 식의 이야기를 하지만 내 나름 따뜻한 마음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것인가. 젊은 시절, 그런 변명을 해보기는 했지만 이제는 침묵의 시간으로 내자신을 추스린다. 세월이 나를 온화한 사람처럼 만들어준 것이다. 적어도 겉으로는말이다.
할 일 없이 거리를 쏘다니는 그 버릇이다. 두매는 항상 외로웠고 쓸쓸했다. 사람이 그리웠다.
가끔씩 할 일 없이 다른 이들 페이스북을 들여다보며 인터넷을 쏘다니던 버릇이 있었다. 아마도 머나먼 이국 생활에 항상 외롭고 쓸쓸해서, 사람이 그리워서 그런 것일까. 언젠가부터 그런 내 자신이 역겨워지기 시작했다. 결국 모든 SNS를 지워버리거나 폐쇄한채 익명블로그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글을 쓰며 내자신에게 이야기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안 본 일을 가지고 간둥간둥 애기하는 거 아니다.
간둥간둥이라는 것은 조심성 없이 데면데면하게 하는 모양을 말한다. 그럼 데면데면하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친밀감이 없이 예사로운 모양을 말한다. 결국 이것은 안 본 일을 가지고 대강대강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표현이다. 간둥간둥이라는 표현이 흥미로워서 그 뜻을 찾아보고 필사해보았다.
한 해, 두 해 책장 넘기듯 쉽게 가버리고 설마 설마 하며 보낸 세월 배물리 먹은 일 별로 없고 일 안 하며 놀아본 것도 아니지만 이들 눈앞에는 황혼의 서리가 내리고 있는 것이다.
한 해, 두 해 책장 넘기듯 시간을 보내버리고 벌써 수십여년이 흘러버렸다.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이국땅에서 취직을 했고 결혼을 하고 늦둥이들을 가졌다. 이제는 황혼의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 머리카락을 보며 흘러간 세월을 듬성듬성 기억해본다. 공부한다는 미명아래 열심히 놀지도, 열심히 일하지도, 열심히 돈을 벌지도 못한 것 같아 아쉬운 인생. 그나마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었고 아직도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는다.
뭉게구름같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정체 모를 근심은 벌써 달포 가까이 서희를 어지럽혀온 터이긴 했다.
그런 때가 있다. 큰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정체 모를 근심이 뭉게뭉게 피어나는 때. 그런 기분은 주로 내 주변에서 불확실성이 높을때 생긴다.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불확실성, 가족과 관련된 불확실성.. 그 불확실성을 혹자는 리스크라 부르기도 한다. 통제할 수 없는 불확실성을 가지고 하늘의 운명에 기대야할 때 정체모를 근심은 주변에서 진을 치고 나를 계속 괴롭힌다.
증오와 저주의 바다
그 바다에서 나는 아직도 허우적대고 있는 것일까? 어찌보면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이 낯선 곳에서 살아남게 한 땔감이요 번개탄이었다. 이제는 그만 나올 때가 되지 않았는가.
무조건이 있을 수 없는, 세월에서 터득한 판단이 그의 경품을 잠재운 것이다.
가끔씩 흔들리는 마음도, 쓸데없는 불안감도, 갑자기 복받쳐오르는 감정도, 세월에서 터득한 판단과 이성으로 잠재우는 법을 배웠다. 어쩌면 이것은 나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던 사람과 상황때문에 길러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과 그 상황에 이제는 감사라도 해야 하나.. 허탈한 웃음만이 나올 뿐이다.
고독과 고뇌와 멍에를 쓴 불행한 여인 - 천부의 미모는 과연 자기자신을 위한 행복은 아닐 성싶다. 자신의 미모로 하여금 행복을 느끼는 가엾은 천치가 아니면은 그 행복이 환상일 따름이요 기만일 뿐이다. 여자의 미모는 타인의 행복이다.
여자의 미모는 타인의 행복이다. 맞다. 여자의 미모와 몸매는 남자들의 행복이다. 그것이 통속적이고 쾌락적이라 비난해도 어쩔 수 없다. 환상 속에서 자신의 행복을 즐기는 남자를 무어라 할 것인가. 다만 그 환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자신을 기만하고 다른 이들을 기만하는 인간의 태도가 무서울 뿐이다.
모서리가 다 깎여버린 능숙한 태도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섬세함으로 세상과 사람을 대하는 능숙한 태도. 모진 풍파를 다 겪고 성장한 사람을 보면 그 기운을 느낄 수 있다고 하는데 가끔씩 그 말이 헛된 것이 아님을 깨달을 때가 있다.
뜨거운 감정 속에 냉혹한 판단이 밀려든다.
갑자기 복받쳐오르는 감정 속에 냉정한 판단을 하는 것은 세상을 살아온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 판단의 냉혹함은 자신을 향할 수도, 내 주변 사랑하는 사람을 향할 수도, 내가 멀리하고 싶은 이를 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그 냉혹함이 내 감정의 칼날을 부드럽게 감싸주기를 바랄 뿐이다.
너는 착하게 살아라. 천대받고 살아라!
찾하게 사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 말 잘듣고, 고분고분하고, 시키는 일을 다하면 윗사람, 윗어른들에게 인정받는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시키는 일을 다해주면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고맙다는 말 한마디 듣지 못했다. 행여나 실수를 한번 하면 불호령과 더불어 다른 이들에 화내지 못한 일을 나에게 쏟아부었다. 그렇게 천대받고 살다가 어느날 깨달았다. 이렇게 사는 것은 내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고. 그리고 그때부터 과감히 '아닙니다", "못하겠는데요" 답변을 시작했다. 그 날 이후 나는 윗어른들에게 세상에서 제일 못된 버르장머리를 가진 청년으로 자리잡았다. 내가 원하는 인생길을 가려하는데 왜 못된 놈이 되어야 하나. 그 생각을 하면 나는 정말 서글펐다. 가끔씩 지인과 술자리를 하다 술이 취하면 난 그런 말을 하곤 했다. "그래 넌 찾하게 살아. 그렇게 노예처럼 살아."라고..
끈질기게 심지를 태우고 있는 불길은 잦아졌다가 아슬아슬하게 되살아나곤 했다.
생명이란 부질없이 가벼운 것이기도 하면서도 질긴 것일까? 갑작스런 부고(訃告)를 들은 후 사고로 저세상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때는 생명이 참 가볍디 가볍고 덧없다 생각하다가도 생사의 기로에서 힘들게 숨을 몰아쉬는 사람을 볼때는 참으로 질긴 것이라 느껴진다. 죽기전 마지막 소망을 위해 끈질기게 심지를 태우는 불길이 바람에 잦아들다가도 겨우겨우 되살아나는 것은 질긴 생명력이라기 보다는 소망에 대한 질긴 염원이라고 해야 할까.
부자도 안 좋을 기고 너무 기찹아도 (가난해도) 못 살 기고 그냥저냥 묵을 만치 하고 사는 기이 젤 좋다. 식구들이 화목하고 자식은 서넛 낳아서 나는 똑 그랬이믄, 우리 홍이가 그랬이믄 싶다."
돈에 대한 욕심은 없다. 그저 남들에게 손벌리지않고 무시당하지 않을 정도로만 살면 된다. 딸하나 아들하나 낳아 화목하게 살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큰 욕심은 없다. 그렇게 남의 눈 신경쓰지 않으면서 유아독존(唯我獨尊), 독야청청(獨也靑靑)하며 살고 싶었다. 그런데 왜 내가 태어난 나라에서는, 내가 자란 고향에서는 그것이 그렇게 힘들었을까? 결국 머나먼 타국땅까지 와서 내 조그만 바램을 이루었다는 것에 안도감과 더불어 깊은 한숨이 나온다.
길흉사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의 감정이란 확대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좋은 것은 더욱더 좋게, 나쁜 것은 더욱더 나쁘게, 슬픔이나 기쁨도 표준을 잃기 쉽다.
아직까지는 정이 들었던 사람, 살면서 기대고 가까웠던 사람들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지 않았다. 아직은 내가 젊은 것일까? 운이 퍽 좋은 편에 속한 것일까? 제대로 된 길흉사를 경험하지 못해서인지 그 순간 사람들의 감정이 확대된다는 말이 이해는 되나 어떤 느낌이 가슴에 와닿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 길흉사가 한꺼번에 닥칠 날이 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날이 왔을때 나의 감정이 어떻게 표류할지 알지 못한다. 그 슬픔이나 기쁨의 표준을 알지 못하기에 좋은 것은 더욱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은 더욱 나쁜 것인지를 알지 못할 것이다. 좀더 많은 인생사가 나에게 필요한 모양이다.
생과 사 그 틈바구니의 빛깔이란 참으로 미묘하다.
생과 사 그 틈바구니의 빛깔이라는 말에 유독 관심이 갔다. 그 빛은 어떤 빛일까? 내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그 찰나에 누가 내 몸 곁에 있을 것이며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가. 내가 살아왔던 시간과 내 마음가짐을 알아주는 이가 있다면 그 찰나의 빛깔이 어떤 것인지 말할 수 있을텐데 그런 이가 아직까지 만들지 못했음에, 아니 만들수 있었음에도 그들을 포기하고 도망쳐왔음에 아쉬운 눈물이 고인다.
옛말에 사람이란 관뚜껑에 못을 박아야만 그 사람이 어떻다는 말을 할 수 있다.
그 사람만이 아닌, 그 사람이 키워내고 돌봐준 사람이 어떻다는 말까지 할 수 있다. 적어도 한국사회에서는. 그 사람과 가족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능력으로 죽어서 저승가는 길에도 겉치레의 화려한 색깔이 칠해지는 곳에서는 이 말이 사실이다. 하지만 적어도 사랑하는 이의 작별인사를 받으며 외롭지 않게 죽는 것만으로 복이 아닌가? 문상객 숫자와 부조금 숫자가 그렇게 중요한가. 죽음의 문턱에서도 타인의 시선을 신경써야 하나? 적어도 장례식장에 가서 그런식의 이야기는 하지 말자.
사람이란 어떤 뜻으로 외롭지 않게 죽는 그것이 복.
이렇게 말한다는 너무 소박한 것인가? 죽은 후에도 타인들이 말하는 평판에 신경을 써야 하는가. 본인이 타인에게 소홀히 대하며 살았다면 문상객이 적은 것은 당연할 것이지만 사랑하는 가족이 추억사진과 그리움의 눈물로 소곤소곤 가족끼리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외롭지 않게 죽은 것이 아닌가?
날카로워진 감정의 칼날
나는 아직도 누군가에게 날카로워진 감정의 칼날을 가지고 있다. 그 날카로움을 보듬어보려 스스로 노력하지만 잘 안될때가 많다. 그럴때 제일 좋은 방법은 그 사람를 상대하지 않고 피하는 것이다. 내 기억속에서 그 사람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그 칼을 쓰지 않도록 스스로 절제하고 참는 것이다.
차디찬 것이 동공에 모여들고 몸 전체에서 중심을 향해 모여드는 것 같다.
알 수 없는 분노가 가슴 속에서 차오를때면 냉정한 눈빛을 가진 얼음표정 사람이 되어버린다. 주변의 모든 것이 마음 속 분노로 집중되면서도 분노의 상대에게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에 대해 신중함을 보이는 것과 주저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것 사이에서 갈등한다. 신중함은 나에게는 우유부단함을, 상대에게는 내가 만만함을 제공할 것이다. 주저하지 않는 것은 나에게는 순간의 쾌감을 줄 수 있으나 상대에게는 상처과 또다른 형태의 분노를 제공할 것이다. 그 순간의 선택이 현재와 미래, 혹은 과거의 나까지 정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뜻 없이 왔느니라.
여기는 뭐하러 왔냐는 질문에 기가 막힌 응수가 아닐까 한다. 뜻 없이 왔다며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 상대방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살아 있는 생명이 무슨 힘으로 저다지도 응고되어 반사할 줄을 모르는가
사람들이 보내는 비난, 조롱, 동정의 시선에 꼼짝않고 자기할 일만 묵묵히 하고 있는 사람이 보이는 생명력은 애처롭기보다는 돌덩이같이 단단한 비감함에 두려움을 준다. 내가 그런 생명력을 두려움과 더불어 알 수 없는 경외감까지 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침묵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환의 존재에 눌리기 시작한다.
길상이 끊임없는 침묵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환의 존재에 기가 눌린다. 어색한 자리에서 끝없는 침묵은 인내심의 싸움이라기 보다는 서로간 자신의 기를 뺏기지 않는려는 기싸움이다. 서로의 눈을 마주보기보다는 눈길을 외면하며 상대방이 어떤 말이나 행동을 취할때까지 기다리는 끝없는 인내심의 싸움이다.
사람이란 날 때부터 푼수라는 게 있는 게야. 그게 천질이라는 거지. 해서 내가 짐승으로 치지면 호랑이는 못 되고오.
자신이 천하의 호랑이는 못되더라도 수백년 묵은 여우의 간사함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공노인. 그러한 간사함도 타고 나는 것일까. 그런 면에서 내 감정을 솔직히 풀어놔버리는 나는 전혀 간사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
편하다는 그 날이 죽는 날
아마도 나는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편하게 살 날은 많지 않을 듯 싶다. 아마도 스스로를 옭매이는 성격때문이리라. 완벽을 추구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자기의문에 고민하는 성격때문이리라. 몸이 힘들어도 내가 고생하면 그만이지 하는, 다른이와의 이익싸움에 게으른 천성 때문이리라. 이런 나역시 편하다는 그 날이 죽는 날일까.
냉정해지니까 왜 울고 왜 그토록 노하였는지 좀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불같이 화를 내다가도 시간을 지나 감정이 가라앉은 상태에서 지난 일을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내자신을 불사를 정도로 마음 속 깊은 곳에 불을 태웠나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불길을 밖으로 뿜어내지도 못했으면서 말이다.
견디어야겠기에 서희는 외면하고 못 들은 척하는 일이 흔히 있다.
가끔씩 모진 말을 들으면 마음 속 분노와 설움을 견디어야겠기게 그 말을 외면하고 못 들은 척한 적이 많았다. 속에서 새빨갛게 타들어가는 슬픔을 조용히 삼키며 내일은 조금 나아질거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혼자 타인들에게 둘러싸였던 지난날에도 이렇게 외로움을 느끼진 않았다. 느낄 겨를이 없을 만큼 숨가쁜 도약이 있었을 뿐이다. 싸움과 싸움의 연속이었다. 승리의 언덕은 외로운 자리였는지 모른다.
말도 통하지 않는 곳 직장생활 속에서 보이지 않는 차별을 받으면서도 나는 외로움의 사치를 즐길 겨를 없었다. 나에게는 이 낯선 곳에서의 생존이 더 중요했다. 내 자신과의 싸움, 경쟁자와의 싸움, 나를 바라보는 타인과의 싸움, 싸움과 싸움의 연속이었다. 그 싸움은 승리의 언덕에 올라서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누구든 함께 여행을 하다보면은 상호 간에 가로놓인 의식의 울타리는 다소간 걷히게 마련이다.
가족이 아닌 누군가와 여행을 해본 적이 정말 기억에 가물가물하다. 타인과 교류가 거의 없다시피 하면서 나와 그동안 알고 지내던 지인들 상호 간에 가로놓은 의식의 울타리는 걷잡을 수 업이 높아지고 두꺼워졌다. 몇년전 나영석 PD의 "꽃보다 청춘"이라는 프로그램을 시청하면서 가끔씩 가족이 아닌 친한 지인들과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여행 속에서 가족에게 보이지 못한 모습을 노출시키고픈 욕망을 충족하고 싶었다. 물론 그 꿈이 실현될지는 미지수지만 말이다.
수치를 모르는 자, 세상에서 못할 것이 뭐 있겠는가.
타국땅에서 언어와 문화를 빨리 체득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수치를 모르는 자, 낯짝이 두꺼운 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세상 어느 곳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으며 세상에서 못할 것이 없다. 그 빌어먹을 놈의 체면과 자존심이 우리 잠재능력을 억누르고 있을 뿐이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순간마다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는 것 같은 김환의 기분을 길상은 느낄 수 있었다. 뭔지는 모르나 처참하게 가라앉는다. 어떤 때는 한 발 내밀 적에 빠른 속도로 쑥쑥 떨어져내리는 것을 역력히 느낄 수 있다.
한국땅을 밟았던때, 밤늦게 한때 몸을 담았던 장소 부근을 걸었다. 좋은 기억, 나쁜 기억, 그리움과 분노가 섞여 한 발 한 발 내딛는 순간 나도 모르게 내 기분이 아래로 가라앉는 것 같다. 알 수 없는 처참한 기억이 내마음을 둘러싼다. 그 장소가 가까워질수록 내미는 한 발자국에 내 기분이 빠른 속도로 쑥쑥 떨어져내리고 만다.
조물주 같은 나쁜 놈이 어디 있으며 조물주 같은 사기꾼이 어디 있단 말이냐!
'교회 다니십니까' 라는 질문에 나는 '전 유물론자입니다.'라고 답한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 나는 외친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모두 착한 이는 아닙니다. 하느님을 외치는 사람만큼 자기 욕망을 숨기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하느님을 내세우는 이같은 사기꾼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성현들을 대신하여 죄인이 된 슬픈 백성을 위해 운다.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이나 희생자는 천물이요 죄인이지. 어쩔 수 없게 몰아넣어 넣고.
성현을 먹고 마시고 입고 잠들게 한 것은 하나님 아닌 죄인들의 덕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듯 슬픈 울음을 기다랗게 낸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에서 마치 도살장에 줄지어 끌려가는 돼지의 슬픈 움직임처럼 말이다. 그 슬픔과 울음에는 인간의 욕심이 죄인을 만들고 그 죄를 사하기 위해 신을 만들고, 그 신을 축복하기 위해 인간은 또다른 죄를 짓는 그 어이없음과 자기자신을 희생해야하는 비탄스러움이 담겨있다. 결국 그 성현을 그 자리에 올려놓은 것도 하나님이 아닌 죄가 많은 우리 인간들 덕분이 아니던가.
시름에 젖은 듯 죄인을 만들어내고 지우고 하는 그따위 교활한 조물주의 총아가 되느니보다 지옥이랴말로 내 고향이야.
천국과 지옥을 가는 것은 본인의 선택이다. 우리는 항상 선택의 기로에 서서 살지 않는가. 천국과 지옥을 가는 것도 본인의 선택인데 왜 천국을 가야만 한다고, 그럴려면 조물주를 믿어야하냐고 강요하느냔 말이다. 그러는 당신들은 지난 2000년동안 당신들의 종교를 믿지 않는다고 학살하고 믿는 방향이 다르다고 서로 죽이고 또 죽이기를 그 죽음의 숫자가 수백만에 달하지 않았더냐. 말해보라. 당신 종교를 믿었다고 죽임을 당한 순교자의 숫자와 당신 종교때문에 학살당하고 죽임당한 사람들의 숫자를. 그리고 그 숫자 앞에서 당신은 당당하게 그 종교를 믿으라고 다른 이에게 강요할 수 있는가? 그런 식으로 정의내린 지옥이라면 그 지옥이 내 고향이 될 것이다.
죽음이란 처참해도 있는 채 그대로 놔두고 사는 것이니까요. 사람이 사람 아닐 수 없는 이상 죽음은 넘어갈 수도 넘어올 수도 없는 거니까요.
죽음은 내 존재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죽음 이후 세상에 대해 규정짓거나 걱정할 이유가 없다. 죽음이 처참한 이유는 아직 벌어지지 않은, 다가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포장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실망감과 분노감이 처참함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 통제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는 순간, 죽음은 나와 하나가 된다. 넘어가거나 넘어올 이유가 없는 내 몸 하나의 현상이 된다.
부드러운 새 잎새들이 미풍 따라 곱게 몸을 누이고 있었다. 삼라만상의 질서, 법칙에 귀의하듯이.
따뜻한 봄날, 새롭게 돋아난 잎파리들이 산들바람이 몸을 여기저기 흔든다. 자연의 숨소리에 따라 앞으로, 뒤로, 마치 음악가락에 따라 춤을 추듯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인다. 순리에 따라,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대자연의 법칙에 따라, 우리 인생도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다.
우리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은 한갓 감상이요, 그네들이 추하다 생각하는 것이 현실이었네. 내 노여운 음성은 허울만 남은 호랑이 울음이었고, 그네들의 맞서는 음성은 발톱으로 먹이를 찢어발기는 이리떼의 울음이었네.
정의를 부르짖고 아름다운 젊음을 생각한 것은 한갓(다른 것 없이, 겨우) 감상이었다. 당시 추하다 생각했던 속물근성과 냄비정신은 현실이었다. 내 아름다웠던 이상과 꿈은 허영덩어리가 다닥다닥 붙은 누더기였을 뿐이고, 내가 맞서던 권위와 허위의식은 조그만 강아지 왕왕 짖어대는 의미없는 울음이었을 뿐이다.
잊어버리고 싶기도 했다. 묘향산이나 구천이를. 잊어버리고 싶을 뿐 잊어지는 일은 아닌 것이다.
한국에서 있었던 불편한 일과 불편한 인간관계 모두를 잊어버리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잊어버리고 싶을 뿐 잊어지는 일은 아니었다. 이제는 내가 부정할 수 없는 존재의 일부가 되어 죽음의 순간까지 나를 지켜주거나 끈질기게 괴롭힐 것이다. 그렇게 나는 과거의 사슬을 질질 끌며 앞으로 남은 삶을 살아갈 것이다.
토지 제8권은 서희 일행이 길상을 남겨둔채 평사리로 돌아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용정에서의 이야기는 조국을 등진 사람들의 애환과 독립운동가들의 민중에 대한 이상과 같은 무거운 주제을 다루었다. 9권에서 펼쳐질 평사리에서의 이야기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서희의 조준구에 대한 복수 이야기일까, 평사리로 돌아간 사람들과 남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일까. 자못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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