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rram's Life
[독후감] 토지 제7권 - 박경리 본문
토지 제7권에서는 일제에 항거하는 동학교도를 이끄는 환의 카리스마적인 면을 잘 묘사한다. 서울에서 머물러 자신의 낡은 권위의식도 아직도 싸우고 있는 상현의 비겁하고 나약한 심리를 묘사한다. 서희와 길상이 서로에게 난 상처를 보듬지 못하고 각자의 길을 묵묵히 가는 불편한 동행을 묘사한다. 평사리 사람들과 오랜만에 재회한 기화가 과거 자신의 옛 모습은 봉순이를 그리워하는 속마음을 묘사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방랑하는 스림 혜관의 눈에서 한폭의 인물화가 그려지 듯 생생히 관찰되고 이야기된다. 책 마무리부분에 서희가 결국 조준구에 대한 복수의 실마리를 찾는 모습이 나온다. 권위의식과 집념으로 똘똘 뭉친 서희의 모습이 아름다움으로 치부되기엔 왠지 처철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자신의 사랑도, 여인으로서 삶도, 주변인과의 관계도, 복수라는 이름아래 희생시킬 각오가 되어있는 서희에게 나는 연민을 느낀다. 마치 자기연민의 착각처럼 말이다.
환이 입가에 서릿발 같은 미소가 떠오른다. 노골적인 야유, 야유인 동시 살기다.
토지에서 환이는 나에게 참 매력적인 인물이다. 낳아준 어머니를 마님이라 불러야 했고 배다른 형의 부인, 형수를 사랑한 나머지 그녀를 데리고 야밤도주해야 했으나 결국 죽음의 이별을 해야했던 그였다. 세상 모든 것이 절망 그 자체로 보였을 것이며 자기 존재의 끊임없는 부정이 이어졌을 것이다. 그가 보였던 차가운 눈빛과 세상 모든 허영과 허위의식에 대한 냉소적인 미소, 야유, 야유인 동시에 느껴지는 살기는, 내가 원하는 모습이지만 그렇게 될 수 없는, 내 꿈속 나의 모습이다.
소인배라는 자의식이 그를 부끄럽게 했고 자신에 대한 능멸감 때문에 견딜 수 없게 한다. 그럼에도 어찌하여 매번 환이에 대해서만은 늪과도 같은 도전의 유혹에 빠지는 건지 윤도집은 알 수가 없었다.
내 스스로 소인배라 여겨본 적이 많다. 쓸데없는 질투심에 눈이 멀어 나에게 잘해주는 이에게 투정을 부리곤 했다. 그렇게 투정부리며 결국 내 자신에 대한 능멸감으로 상대방을 냉정하게 대하는 경우도 많았었다. 하지만 나는 윤도집이 김환에게 도전하는 형식으로 투정을 부리진 못했다. 겁쟁이처럼 상대방을 무시하고 피할 뿐 도전의 유혹에 빠지는 법은 없었다. 그런면에서는 윤도집이 나보다 훨씬 나은 인물이다.
나는 살아서 이 끝없는, 이, 이건 끝이 없는 쳇바퀴요, 나는 한 마리의 개미 아니겠소? 아무것도 없는, 가도 가도 꼭 같은 길이오, 다만 길이 있을 뿐이오.
꿈이 있는데, 목표가 있는데, 내 능력이 부족한 것을 깨닫고 스스로 절망하여 내자신에 외쳐본다. 나는 버러지만도 못한 존재라고. 계속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쳇바퀴 마냥, 같은 길을 가고 또 가는데 그 길이 맞는 길이지도 알지 못하는 내자신이 너무도 싫었다.
가슴에서 치는 고동소리가 가랑잎 구르는 소리 사이로 뚜렸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었다.
그런 내 자신이 싫어 울고 또 울고 싶은 마음에 가슴이 너무도 답답했다. 가슴을 쥐어짜고 한숨을 쉬어도 가슴 속 무언가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하다. 심장 고동소리 하나하나가 머리카락 끝으로 파르르 전해지는 것만 같다. 그 답답함을 어떻게 풀었었나. 지나버린 그 시간이 현재의 나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생각해본다.
권위의식이 눈빛을 싸늘하게 만든다.
그런 사람이 있었다. 권위의식으로 똘똘 뭉쳐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곤 했다. 내 삶을 살아가며 여러 종류의 사람을 내 주변에 두게 된다. 그리고 나는 어떤 사람과 계속 관계를 맺고 또는 끊어야하는지를 배우게 되었다. 내가 실패하여 낙담했을 때 위로의 말을 건네는 사람, 같이 앉아서 묵묵히 시간을 보내주는 사람, 아무 말 없이 나와 거리를 두는 사람, 모른 척 자기 이야기만 하는 사람. 그 중에서 가장 피해야할 사람은 조롱과 야유로 내 실패를 비웃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떠난 후 나는 진정한 내 꿈을 향해 날개짓을 할 수 있었다.
나는 남을 위해서보다 내 자신을 다스리고 싶소.
집을 떠나온 후 항상 이 마음을 가지고 지난 세월을 살아왔다. 남을 위해서 산다는 허울좋은 변명보다는 내자신에 떳떳하고 주체적인 삶을 살고 싶었다. 그리고 그 삶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바람도 번뇌요 시냇물도 번뇌요. 산새들 짐승울음, 철 따라서 피고 지는 산꽃들, 그 어느 하나 소리와 형체를 겸하지 않는 것이 없을 터인데 심산유곡이라고 현세가 아니란 말이가. 사시장철 목숨의 소리들은 충만하여 있거늘.
심산유곡(深山幽谷)이란 깊은 산속의 으슥한 골짜기를 뜻한다. 아무리 세속과 동떨어져 깊은 산속에 은거해도 현세에서 가져온 번뇌를 떨쳐버릴 수는 없는 법이다. 비록 나에게 고통을 안겨주던 곳을 또나 머나먼 곳으로 도망쳤으나 그 고통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듯 말이다.
평소 제 마음의 소치
여기에서 소치(所致)란 어떤 까닭으로 생긴 일을 의미하는 것 같다. 책에서 한자가 나오지 않아 어떤 소치를 의미하는지 조금 헷갈렸다. 보통 사람들이 말하기를 "제 부덕의 소치"라고 하는데 그런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닐까. 표현해석이 좀 애매해서 필사해보았다.
제 앉은 자리가 마음에 걸려서 하는 터수겠는데 자랑스러울 것까지는 없다 하더라도 창피스러울 것 한 푼 없고 떳떳하지 못할 것도 없고, 남의 눈치를 보니까, 똥 뀐 놈이 화내더라고.
터수는 살림살이의 형편이나 정도를 말한다. 비단 살림살이 뿐이냐. 어찌보면 자기수양의 형편이나 정도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내 입장이나 처지가 떳떳하지 못하여 자랑스러울 것이 없다보니 남의 눈치를 보게 되고 쓸데없는 허세를 부리게 된다. 그 허세에 조금이라도 상처가 되면 방귀 뀐 놈이 화내듯 그렇게 다짜고짜 화내는 이가 있다. 그런 이를 대하는 나의 자세는 그저 멀찌감치 떨어져 스스로 자멸하는 것을 차분히 바라보는 것이다. 방관하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그런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일 수도 있을테니.
학문을 잘못하면 병이 들 수도 있을 거요. 자기 자신을 찾다 찾다 보면 좁쌀이 되니까요.
나 자신을 찾기 위해 책을 읽고, 자기 성찰을 하고, 명상을 하고, 그렇게 자기 자신만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다보면 오히려 시야가 좁아지고 다른 이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좁쌀 같은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일까? 아니면 사람과 어울려 일을 하는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다르게 자기 혼자 일을 하는 사람 역시 좁쌀 같은 이가 되버리고 많은 것일까. 내 경험 상 학교에 연구직 또는 교수로 계시는 분들 중 좁쌀이 되어버린 분을 많이 봐온 듯 하다. 물론 그것은 내 선입견일 수도 있겠지만...
그리운 정을 손아귀 속에서 뭉개버린다.
서희가 아주 오랫만에 '기화'가 된 봉순이를 만나는 순간 그리운 정을 표현해도 되건만 그것을 손아귀 속에 뭉개버리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에게 뼈속까지 박힌 양반으로서 권위의식을 볼 수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본다. 남들 시선에, 체면때문에 자신의 진심, 그리운 정을 가까운 이에게 표현하지 못하고 다른 이들 보는 앞에서 묵사발 만들어버리는 사람들. 그런 사람에게 정을 주어 무엇하며, 만나서 무엇하랴.
권위의식의 뿌리는 깊게 아주 깊은 곳으로 뻗어만 가는데 그러나 서희는 날이면 날마다 깊은 뿌리에서 뿌리를 쓸어대는 톱질 소리를 듣는다. 그럴때마다 뿌리는 더욱 깊은 곳으로 뿌리는 더욱더 강인하게..
권위의식을 조롱과 비웃음으로 대할수록 그 권위의식을 더욱더 강하게 내세우는 사람이 있다. 더 깊은 곳으로 더 강인하게 자기자리를 확고히 지키려드는 것이다. 나는 그 권위의식이 싫어서, 그 권위의식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싫어서, 그리고 나도 모르게 그 권위의식에 물들어가는 것이 싫어서, 그 곳에서 도망쳐 나왔는지도 모른다.
울음은 목구멍에서 아래로 심장으로 내려가 응어리진다.
결코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진실을 받아들어야 했을때 나는 울음을 삼켜야만 했다. 그 울음 목구멍에서 아래로 심장으로 내려가 응어리지고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시새움도 일지 않았고 그리움도 사라진다.
한 때 알고 지내던 이의 소식이 멀리서 들려온다. 서로간 불편한 일이 있어 연락을 두절한지 오래되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나름 잘 살고 있다 한다. 이상하게도 시새움도 일지 않았고 그리움도 사라진다. 이제 정말 남남이 되어버린 것일까...
시기와 조롱을 면전에서는 교묘히 감추는 뭇시선 속에 상처받기론 마찬가지다. 그 상처를 서로 감추고 못 본 척한다.
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의 아내는 명문대를 나왔고 영어도 잘하며 외국계기업에서 간부급으로 인정받는 커리어우먼이다. 그 사람은 지방대를 나왔고 영어가 익숙치 않으며 본인이 열심히 노력하여 취업한 외국계기업에서 점점 서열이 밀리면서 언제 잘려나갈지 걱정한다. 하지만 그 사람은 지인들 앞에서 자신은 똑똑한 아내를 가졌고 외국계기업에 다니는 성공한 인생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한다. 그 우월감에 젖은 허위의식에 대해 사람들은 시기와 조롱을 하지만 그 사람 면전에서는 교묘히 감춘다. 그 사람은 처음에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다 자신의 처지가 어려워지자 점점 다른이들의 시선에 상처를 받기 시작한다. 아내도 친정사람들과 다른이의 뭇시선 속에 상처받기론 마찬가지다. 그 상처를 서로 감추고 못 본 척한다. 그런 인생이 정말 행복한 인생일까. 그 인생을 살고 있는 그 사람이 문득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움은 물론 아니었다. 옛날 상태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세 사람의 노력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자기 감정에 가장 냉혹한 사람은 최서희였다.
15년동안 서로 얼굴을 보지 않았는데도 그립지 않고 마음이 불편한 상대가 있다. 오래전 나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그 상처에 대한 어떠한 이야기도 할 수도 없는 상대이기에, 그래서 다시 보기 불편한 사람이다. 그런 상대와 다시 얼굴을 보고 마주 앉게 된다면 그 사람이나 나나 옛날 상태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노력에 침묵의 정적이 이어질 것이다. 아니, 나는 간단히 할 말만 하고, 기본적인 예의만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날까. 가끔씩 그런 순간을 상상해본다.
자신이 송두리째 무너지려는 찰나였었다. 어쩌면 그때는 자유를 향해 달릴 수 있는 길목이었는지 모른다. 집념의 질곡에서 풀려날 순간이었었는지 모른다.
내자신이 송두리째 무너져버리는 순간 내마음의 자유를 찾을 수 있었다. 성공도 실패도 더이상 연연해하지 않고 사람에 대한 집념도 버린채 오로지 벌거벗인 내 자신을 똑똑히 바라볼 수 있었다. 내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주었고 모든 번민에 초연한 자세를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
그의 아름다움은 그의 권위요 아집이요 숙명이다. 그의 아름다움과 위엄과 집념은 그의 고독이다.
아름다움과 위엄과 집념이 삼위일체가 되어 서희라는 인물을 탄생시켰다. 그렇게 완벽을 추구하는 인물은 항상 고독한 법일까? 그 고독이 항상 애처롭게 보여야하는 것일까?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은 아니지만 욕심의 결정체임은 분명하다. 그 욕심을 버리는 것 또한 고독과 고뇌의 산물 아니던가. 아름다움도, 위엄도, 집념도, 결국 나를 위한 것인데, 그 욕심이 과해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성취하고자 하면 그것이 곧 악惡이 되고 마는 것 아닌가. 그 악이 타파해야할 대상이 되면서 적敵을 만들고, 그렇게 인간은 나자산과 타인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삶의 무게를 견디어낸다.
세월이 꿈틀꿈틀 움직이며 지나간다. 사람들, 흘러가버린 사람들, 남아 있는 사람이 지나간다. 무리를 지어가는 얼굴들, 그 낯설지 않은 얼굴들이 지나간다.
갑작스레 오래전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가 있다. 흘러가버린 세월속에 내 기억속에서 나타났다 안개처럼 사라져버리는 이가 있는가 하면, 아련한 아픔으로 남아있는 사람이 강물에 비춰진 얼굴마냥 나타났다 사라진다. 불타는 노을 마냥 분노와 회한속에 또렷이 기억나는 얼굴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오래된 흑백사진 마냥 점차 바래지다가도 갑자기 그 얼굴이 불에 다오르며 재가 되었다가 다시 또렷해지기를 반복한다. 꿈틀꿈틀 지나가는 세월 속에 나는 그 잿더미를 언제 같이 날려보낼 것인가...
파란 하늘이 빗물 속에 있고 구름도 빗물 속에 있고 바람이 불어와서 웅덩이의 빗물은 호수같이 흔들린다.
빗물이 고인 길바닥을 보면 내 사는 세상이 모두 고인 빗물에 들어가버린 듯 하다. 집건물 사이에 비치는 파란 하늘도, 구름도,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내 얼굴도 보이는데 갑작스레 바람이 불어도 모든 것이 흔들린다. 마치 평온했었던 내 인생이 한순간 흔들려버리듯 말이다.
욕망의 좌절을 본 일이 없는 영환에게 비대한 혹같이 자라난 것이 자만심과 이기심이다.
어린 시절, 욕망의 좌절을 본 일이 없었던 나를 지배하고 있었던 자만심, 이기심, 그리고 허영심. 그것은 쥐뿔도 잘난 것 없던 내가 가지고 있던 병이었다. 이 병은 깨닫지도 쉽지 않으나 극복하기는 더욱더 쉽지 않다. 더더욱 슬픈 것은 한국에서 공부 꽤나 잘 한다며 집안에서 대접받고, 학교에서 대접받고, 사회에서 대접받던 엘리트계층 대다수가 이 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병이 비대한 혹같이 자라 결국 이 사회를 병들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예민하기보다 차라리 우둔한 편인 성품과는 반대로 자만심과 이기심에 한해선 어떤 경우에도 반응은 과민하였다.
자기허위 의식과 자만심과 이기심에 차있는 사람에게 다른 이들이 도전을 해온다면 이에 대한 반응은 매우 과민하다. 지금 엘리트계층이 차지하고 있는 곳을 잘 살펴보라, 검찰개혁과 의료서비스개혁에 대한 그들의 반응이 어떠한가? 교수사회에 대한 개혁은 어떠한가. 그들의 자만심과 이기심, 집단이기주의에 한해선 어떤 경우에도 반응이 과민하지 않은가? 종부세 강화에 대해 가진 자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타인의 생존문제를 짓밟고 자신의 자만심과 이기심을 충족하려는 욕심, 그 욕심은 너무도 가혹하다.
쉽게 고통이나 불행에 무감각해져버리고 습관화된다.
기득권층에게 항상 핍박과 천대를 받는 이들이 정말 조심해야할 것은 그런 고통과 불행에 무감각해져버리고 습관화되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가해자들은 자신의 학대가 정당한 줄 알고 그 정도를 더하게 된다. 자신의 행위가 정의라고 착각하며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져버리는 것이다.
청아한 소리가, 구슬같이 물방울같이 새벽에 사라지는 별같이 우는 밤새 소리같이 흐느낌이 되고 통곡이 되고 한탄이 되면서 향심의 얼굴에 짙은 우수가 흐른다.
빗물 떨어지는 소리와 더불어 들려오는 가야금 소리는 청아한 소리가 처마에서 빗방울이 눈물처럼 뚝뚝 떨어지는 우수한 분위기를 자아내곤 한다. 음가락 한마디 한마디가 뼈마디마디 전율이 흐르듯 내 아픈 마음속 구석구석을 쿡쿡 찔러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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