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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토지 제2권 - 박경리

Barram 2021. 7. 11. 00:41

 

토지 제2권은 구천이를 찾아, 그리고 그에 얽힌 어머니의 비밀을 찾아 나선 최치수와 그를 따라나선 수동이의 마음을 읽어간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한(恨)삼아 재물욕으로 이를 만회하려는 귀녀와 평산, 그리고 그 욕심을 꿰뚫은 윤씨부인을 보며 한때 지나왔던 내 마음의 풍랑을 되새겨본다. 살인자의 가족을 끝까지 챙기는 윤보, 용이, 영팔, 한조 그리고 서서방을 보며 어려운 시절 도와주었던 사람에 대한 고마움을 되살린다. 나름 좋은 표현이라 생각되는 문장이라 필사하고 내 마음을 보는 것 같아 또다시 필사했다. 알게 모르게 이 문장들도 내 표현 속에 녹아들어가길 바라며 계속 필사를 해본다.


꽃가루를 짓밟으며 꿀을 빠는 벌이나 나비같이 즐거워서 지껄이며 웃는다.

꽃가루를 짓밟으며 꿀을 빠는 벌이나 나비... 약자가 또다른 약자를 수탈하는 듯한 이 느낌은 무엇일까. 그 느낌으로 이 문장을 바라보니 즐거워서 지껄이며 웃는 것 같이 비추어지지 않는다. 차라리 꽃가루를 헤치며 꿀을 빠는 벌이나 나비라고 불렀다면 더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다시 먼 강 아래서 물들어오는 노을과 같은 추억이 삼십을 넘은 용이를 옛날로, 어린 시절로 이끌고 가는 것이었다.

잊어야 하지만 잊지못하는 그리움 같은 추억을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마치 내 기억에서 사라져버릴 듯 한 노을처럼 내 마음 속에 남아 어둠 속 과거의 기억으로 나를 끌고 들어간다.

흰 도라지꽃이 핀 산막 뜰에 저녁 안개가 밀려들었다.

흰 도라지 꽃과 어우러진 허연 연기 같은 저녁 안개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른다. 스산함과 서늘함이 동시에 몸을 덥친다.

불빛이 비친 반쪽과 그늘이 진 반쪽의 얼굴, 마치 수성을 반반씩 지닌 것 같은 신비로운 모습이었다. 한 눈은 불타고 한 눈은 냉엄한 것같이 보였다.

환이/구천이 아버지 김개주를 묘사하는 글이다. 불같이 끓어오르는 가슴 속 한을 진정시키고 믿음을 행동으로 옮긴 김개주의 성격을 잘 묘사했다. 나는 그런 얼굴을 가지고 싶은가? 아니면 가졌다고 한때 착각을 했었는가? 

서편에 해가 한 뼘쯤 남아 있었다. 어둠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지 빛과 그늘에 얼룩이 진 숲, 푸른 들판은 엷은 바람에 설레고 서두는 것같이 느껴진다.

늦은 오후, 하루 일상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시간. 직장인의 손은 설레고 서두르지만 퇴근 준비은 노을 속으로 아련히 사라지고 어둠 속 야근을 맞이할 준비를 하게 된다. 어둠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피곤한 몸을 끌고 집으로 돌아가던 농민들보다 더 서러운 삶을 현대인들은 살고 있는 것인가...

메마른 땅에 기승을 부리는 잡풀같이 아이들은 거칠고 조잡스레 날뛰며 달아나는 길상의 뒷모습을 향해 기성을 지르고 손뼉을 친다. 산이며 숲이며 강물, 들판, 눈에 띄는 모든 것은 벌거벗은 자연인데 이 속에서 생물은 부단한 교접에서 풍요해지는 것처럼 쇠똥과 같이 구르며 저절로 자라는 아이들 역시 자연 성에 일찍 눈이 떠지는 모양이다.

동네 아이들이 마을길 따라 헐레벌떡 뛰어가는 길상이를 보며 얼레리꼴레리 봉순이와 사귄다고 놀려댄다. 이 상황을 묘사한 글이다. 너무 간단하게 요약했나? 이렇게 단순하게 하면 되는데 너무 많은 것을 끌어들여 표현한 것이 내 눈에 거슬렸나 보다. 아마도 다른 시대 다른 표현이라서 그런가? 

겨우 이삭을 물기 시작한 들판의 벼는 바람을 타고 짙고 연한 서리빛 초록의 물결을 이루며 서편을 향해 나부끼고 있었다.

초여름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 초록빛 평야가 눈앞에 펼쳐진다. 바람에 너울리는 벼 사이에서 김을 매다가 허리를 쭉 펴고 눈을 감고 바람을 맞으며 논두렁에서 흘러나오는 내음을 맡아본다. 대학 시절 농활 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문장이다.

날씨는 변덕을 부릴지, 조금씩 흩어져 있는 구름이 다소 빠르게 가고 있는 것 같았으나 하늘은 휭하니 높았고 푸른 빛은 차가웠다. 들편은 잔바람에 일렁이고 있었다.

소나기가 내릴 법한 구름을 보며 그 아래 들판을 싸목싸목 (천천히) 걸어가던 아버지의 모습이 생각난다. 사랑하는 이의 모습이 생각나게 하는 풍경묘사글이 참 아름답게 다가온다.

적막한 냉기를 실은 산기운이 걸음을 멈춘 일행들 옷 사이로 스며들었다.

산을 올라가다 보면 땀에 몸이 흥건히 젖어있다가 마주선 바람이 옷 사이로 스며들면서 서늘한 냉기를 느낄 때가 있다. 그 냉기는 산 속에서 왠지 모를 외로움과 적막함을 가져다 준다.

절 식구가 많았을 터인데 경내는 정적 그것이었고 차츰 엷어지기 시작한 밝음이 보랏빛 안개에 휩싸여드는 듯, 변화를 나타내고 있다.

해가 저무는 즈음 조용한 산사에서 새소리를 들으며 바라보는 바깥 풍경 같다. 보랏빛 안개를 가장한 어둠이 산을 뒤덮고 캄캄해지면서 또다른 생명 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눈을 감아도 최치수의 얼굴은 사방에서 모여들어 여전히 우관의 망막을 어지럽힌다.

보고 싶지 않은 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이의 얼굴이 눈을 감아도 모여들어 나의 마음을 어지럽힐 때가 있다. 고개를 흔들어보아도 떠나지 않는 얼굴. 그 얼굴들에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엷은 미소를 띠며 대할 수 있는 날이 과연 올까...

육 척 거구의 정력은 넘쳐 보인다고는 하나 썩은 고목으로밖에 느낄 수 없는 육신과 마음은 지난 일들을 회상한다 해서 가슴을 쥐어박을 만한 회오인 죄근을 위해 우관은 슬퍼하고 있는 것이다.

회오(悔悟)란 잘못을 뉘우치고 깨달음이다. 죄근(罪根)은 죄를 짓게 된 원인을 뜻한다. 지나가버린 과거를 생각하고 죄근을 알고 회오할 수 있다면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을까. 죄근을 아는 과정 자체가 고통스럽고 어렵기만 하다.

어느 누구에게서도 자신의 추리를 확정지을 만한 일을 밝혀내지 못하였으나 여전히 하나의 사실로써 굳어버린 일이었다.

자신의 감으로 모든 일을 사실로서 확정해버리는 사람을 대하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특히 그 사람이 사랑하는 가족분일 때, 그리고 그 분으로 인해 다른 가족이 고통을 받을 때, 가슴 속 아린 감정이 솓아오른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만큼 다른 이를 믿지 못하는 것일까? 그만큼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일까? 살아오면서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고통이 있었길래 저러는 것일까? 사랑하는 가족이기에 고통을 밀쳐내지 못하고 '왜' 라는 질문을 던지며 그분 가슴속을 헤아려본다. 

달이 없는 하늘에 빛 잃은 별들이 껌벅이고 있었다.개 짖는 소리만 이따금 흉스럽게 밤 공기를 흔들곤 했었다.

적막한 밤, 싸늘한 공기 속에서 대청마루에 걸터 앉아 초점 없는 눈으로 하늘을 바라본다. 가끔식 개 짖는 소리에 정신을 깨어보지만 다시 멍한 상태가 되어 우울감에 젖어든다. 

아무리 싫어도 싸움터에서 등을 돌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라를 사랑하는 정열도 없으면서 적병을 향해 치달릴 수밖에 없는 하나의 관념, 굳어져버린 관념의 관습

민족이며 나라를 사랑하는 정열도 없다. 나에게는 내자신과 가족의 안녕(安寧)이 중요할 뿐인데. 사람들는 나와 상관없는 이에게 적개심을 일으키라 말하며 그것이 충(忠)이요 애족(愛族)이라 말한다. 내가 없고 내 가족이 없으면 나라가 무슨 소용이요, 민족이 무슨 소용인가... 너무 이기적인 생각인가?

염치없이 달려들던 잠은 다 달아나고 머릿속은 냉수를 끼얹은 듯이 맑아오기만 했다. 가랑잎을 몰고 가는 바람 소리도 쉴 새 없이 들려온다.

간난 아기를 보다가 꾸벅꾸벅 졸고 있던 나를 보며 아내가 타박을 준다. 아내의 성난 얼굴에 갑자기 머릿 속은 냉수를 끼얹은 듯이 맑아진다. 가랑잎을 몰고 갈법한 아내의 성난 숨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겹겹이 이어진 산봉우리 위에 얼음살같이 갈라져서 쭉쭉 뻗은 구름이 연분홍빛을 띠더니 그것이 시시각각 짙어지면서 봉우리마다 조금씩 다른 색조를 드리운다. 한결 짙어진 구름은 진홍으로, 하늘은 온통 불바다로 변해간다. 장엄하고 화려한 해돋이의 의식이 시작되려는 것이다.

해돋이가 시작할려는 찰나를 정말 잘 묘사했다. 깊은 산 속에서 맞이하는 해돋이가 이 광경이려나. 작가의 풍경묘사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아마도 이래서 기행문를 쓰는 사람들이 대단한 글쟁이라고 불리는 것 같다. 글을 잘 쓰고 싶다면 기행문을 써보라고 권하고 싶다.

뼛속 깊이 박힌 종으로서의 윤리감

뼛속 깊이 박힌 종으로의 윤리감은 뼛속 깊이 박힌 국민으로서의 윤리감과 같다. 국민은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고 국가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 윤리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들... 그래서 나는 '국민'이라는 단어 대신 '인민'이라는 표현을 더 좋아한다. 국가가 아닌, 대자연과 더불어 그에 순응하고 살아가는 인간. 그러나 '인민'이라는 단어는 한국에서 이데올로기 논쟁에 희생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현실에 쫓겨 나는 이 곳까지 왔다.

천지 만물이 시작과 끝이 있음으로 하여 생명이 존재한다고들 하고 탄생은 무덤에 박히는 새로운 팻말의 하나라고들 하고 죽음에 이르는 삶의 과정에서 집념은 율동이며 전개이며 결실이라고들 하고, 초목과 금수와 충류같이 핏줄을 타고 돌아오고 있었다.

간결한 글쓰기의 좋은 예는 아니다. 다만 그 내용에 있어서 삶의 철학을 잘 우려냈다. 생명이란 누군가에 의해 갑자기 이땅에 떨어진 것이 아니라 만물의 시작과 끝 사이에서 일어나는 조화에서 생긴 것이다. 태어나는 순간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욕심을 부리고 다른 이와의 갈등을 통해 성취라고 불리는 것을 이루고 사라져 간다. 마치 모닥불 장작이 활활 타올라 다른 장작과 부딪쳐 소리내며 재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윤씨부인은 무수히 시달려온 아들과의 감정대립 속에서도 한번 느껴본 일이 없는 증오감 같은 것을 느낀다.

자식가진 사람이면 아이들이 성장해가면서 부딪히는 감정대립 속에 알 수 없는 미움을 느낄 때가 있다. 그것이 다만 증오가 되면 안되겠지만...

맑고 부드럽게 빛나던 눈은 감겨져 마음을 닫아버린 것같이 느껴진다.

한때 맑고 부드럽게 빛나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봤다. 하지만 세상은 나에게 눈을 감으라 강요하며 나중에 나이를 먹으면 이해할거라고 속삭였다. 그렇게 나이를 먹고 나는 마음을 굳게 닫아버렸다. 

비웃는 것 같은 여유 있는 말이었다.

내가 보이는 여유가 상대방에게 조롱의 모습으로 다가갈 수 있다. 설령 여유가 있더라도 상대방의 마음으로 조급히 손잡아주는 것이 현명한 처세일 수도 있다.

바람이 구름을 다 날려버린 맑고 푸른 하늘에 하얀 소연이 둥둥 떠서 올라간다. 바람을 잘 잡아올리는 연은 높이, 하늘 높이 얼레의 줄을 풀면서 올라간다.

딸아이와 해변가에서 연놀이를 한 적이 있다. 거센 바닷바람을 타고 날개를 펄럭이며 삼각연이 날아오랐다. 줄을 서서히 풀어주며 더욱더 높이 연을 하늘로 날린다. 딸아이는 꿈을 담아 날아오르듯, 나는 어른이 되버린 번뇌를 보내려는 듯, 그렇게 연을 날려보낸다.

어느 세월이든 본시의 것을 오래 지키는 쪽은 서민인가 하오. 지금 친일하여 삭발하고 양풍을 따라 의관을 바꾼 사람들은 모두 양반들 아니겠소? 제 나라 백성 다스리는 데도 남의 힘, 제 겨레를 치는 데도 남의 힘, 그럴 때의 체통은 불관지산가 본데...

허울좋은 선비의식에 자기 출세만 쫒는 지식인들. 자신의 일을 묵묵히 그리고 우직하게 행하는 서민들. 이 나라는 도대체 누구의 것입니까?

반 식자와 권력자들의 고깃밥이 된 거지요.

반 식자(半識者)란 알아야 할 것을 절반 정도밖에 모르는 사람이란 뜻으로, 배운 지식이 충분하지 못한 사람을 이른다. 유튜브와 인터넷에서 제대로 알지 못하고 알아보지도 않고 금전을 목적으로 자극적이고 잘못된 정보로 다른 이들을 선동하는 사람들. 그런 이들의 고깃밥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주체의식을 가지고 정보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부지런히 공부해야 한다. 

어쩌다가 바람에 날린 솔씨 하나, 석벽에 떨어져서 움이 트고 애처롭게 자란 한 그루의 소나무는 트인 곳 없이 평풍같이 둘러싼 능선에 해가 솟고 달이 뜨며 그 해가 다시 떨어지고 달이 지는 것을 바라보며 능선 밖에 광활한 천지가 있어 그 곳에서도 해와 달이 지고 뜨는 것을 모른다.

인터넷이 있어 모든 정보를 찾을 수 있다고 믿는 이가 있다. 자신의 편견에 빠져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 들으면서 자신이 믿는 것이 모두 사실이고 진실이라고 함부로 말한다. 그런 자의식 바깥에는 보다 다양한 사람과 생각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평풍이 둘러쳐진 것 같은 산속과 넓은 산 밖의 세상을 비춰주는 해와 달이 같이 않을 분만 아니라 산속은 차갑고 고요한 달의 세계요, 산 밖은 지글지글 타는 해의 세계, 하나는 환과 같이 적막한 평화, 하나는 고뇌의 몸을 떨어야 하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똑같은 세상 각자가 처한 현실이 달라 어떤 이는 가지지 못한 번뇌를, 어떤 이는 생존하기 위한 고뇌의 몸을 떨어야 하는 현재가 안타깝다. 공존은 머나멀고 생존이 처절하니 그 존재가 미약하게 느껴질 뿐이다.

죽음으로써 얻어질 휴식을, 죽음에 이르는 황홀한 것 같은 종말을 눈앞에 보며

죽음은 예고없이 내몸뚱아리를 휘감으며 다가온다. 어두컴컴한 부엌 한켠 싱크대에 기대 앉아 맥주 한 캔을 들이켰다. 홀로 사는 아파트는 적막하기만 한데 어디선가 귀뚜라미 비슷한 소리가 들려왔다. 고향 생각이 난다. 가족들 얼굴이 떠오른다. 갑자기 외로움과 절망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맥주캔을 식탁에 놓고 귀신에 홀린 듯 나는 침실로 갔다. 돌아오지 않을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그리고 휴식의 황홀감을 맛본 채 현실로 돌아왔다.  

수수께끼로, 그것도 무서운 힘, 언제 터질지 모르는 힘을 숨겨 가진 수수께끼로 느끼며

수수께끼처럼 알 수 없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의 눈에는 무서운 힘을 숨긴 채 자신의 속마음을 쉬이 내보이지 않는다. 나에게 다가오지 않을 때 신비감처럼 느껴진 사람이 나에게 다가오면서 두려움으로 변한다. 난 그 두려움에 선을 긋고 다른 곳을 응시하며 내 눈초리를 감춘다.

마음 밑바닥에서 안개같이 서려 올라오는 공포

수수께끼같은 사람이 나에게 다가올때 내 마음 밑바닥에서 안개같이 서려 올라오는 두려움에 나는 매서운 눈초리와 쫑긋 세운 귀로 그 사람 동작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된다.

오늘까지 떠받치고 있던 그 나름대로의 윤리가 무너진 데서 오는 정신적인 무질서가 그 마음 바닥에 고여 있던 외로움을 다스릴 수 없는 지경으로 빠뜨렸다 보아야 옳을 성 싶다.

나와 내 주변을 지배하던 윤리가 무너지면서 분노와 절망감에 무너져버린 내 정신세계를 어떻게 수습해야할 지 막막했다.

영신도 없고 목숨도 없고 오로지 영원불멸의 세월만이 영신을 보고 조롱하며 목숨을 보고 딱해하는 것이겠습니까.

흘러간 세월은 분노와 절망에 휩싸였던 나를 조롱하고 비웃는다. 그 세월은 나를 조롱하고 비웃던 자들을 보고 딱해하며 나에게 그런 분노와 절망은 의미없는 거라 충고한다. 그러면서 나의 분오와 절망을 조롱하고 비웃는다. 

막막하고 흐미하여 구름 바다에 휩싸인 것 같았다.

나의 미래가 정말 불확실한 때가 있었다. 막막하고 흐미하여 마치 깊은 산 속 구름 바다에 휩싸인 것 같았다. 어디선가 귀신이 나와 나를 덥쳐 지옥으로 끌고 갈 것만 같았다.

별당 쪽 뜰에서 나뭇잎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을 어느때, 대학 캠퍼스 어느 벤치에 홀로 앉아 지나가는 차들, 사람들, 나무풍경을 바라보는데 낙엽 구르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닌데 그 소리는 내 마음을 너울거리게 했다.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살갗보다 그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한겨울 불어오는 삭풍이 얼굴을 때린다. 코를 훌쩍거리며 언덕길을 올라가다가 고개를 돌려 올라왔던 길을 되돌아본다. 아무도 없는 황량한 언덕길에 내 마음을 때린다. 그 쓰라린 마음에 눈물이 나온다.

고귀함도 염원도 사랑도 밖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밖만 싱그러우면 마음속의 쓰레기는, 자기만이 아는 쓰레기에는 냄새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마음 속 쓰레기 냄새를 맡고 그 역겨움을 느껴 쓰레기를 치워야 하는데, 그 쓰레기가 쓰레기인 것인지 아니면 아직도 쓰고남은 잡동사니인지 구분이 안간다. 세월은 내 마음 속 쓰레기의 역겨움을 지워주었다. 하지만 그 역겨움에 면죄부가 주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목적을 줄달음치는 무모한 행위라 할 수 있었지만 짧은 시간의 임기웅변은 대단한 것이었다.

벼랑 끝에 몰리면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고 없던 용기도 생기면서 무모해지기 시작한다. 또한 시간이 정지한 듯 생각의 속도가 빨라져 생각지도 못하던 임기웅변이 드러나게 된다.

대숲에서 바람이 울고 지나간다.

'임금님은 당나귀 귀' 라고 외치던 노인네의 외침이 대숲에서 울리던 소리가 '너는 겁쟁이, 도망자'라고 들린다. 임금을 두고 하는 말인가, 그 노인네를 두고 하는 말인가, 아니면 나를 두고 하는 말인가...

뜻하지 않았던 흉사를 천착한다거나 호기심에서 왈가왈부할 여유도 없었다.

천착(穿鑿)이란 어떤 원인이나 내용 등을 따지고 파고들어 알려고 하거나 연구하는 것을 말한다. 갑작스런 사고를 당하게 되면 사고 당한 사람을 살피고 그 주변인을 돌보느라 그 사고가 왜 일어난 건지, 어떻게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해 왈가왈부할 여유가 없다.  

백성들은 항상 어디서든 속성에 얽매인 현실적인 동물이었다.

2016년 당시 교육부 나향욱 정책기획관이 "민중은 개돼지로 취급하면 된다"라고 했던 망언 사건이 기억나게 하는 대목이다. 민중은 어디서든 속성에 얽매인 현실적인 동물이라는 것을 속어로 표현한 것이라 보면 되겠다. 하지만 그 맥락적 측면에서 "상하간의 격차가 존재하는 것이 합리적인 사회다"라거나 "신분제를 공고화시켜야 된다"고 하는 주장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민중이 속성에 얽매인 현실적인 동물은 맞지만 그렇다고 신분제로 인한 차별을 정당화시켜서는 안된다. 사람위에 사람없고 사람밑에 사람없다. 

천지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권리를 인정하듯이 농민들은 만석의 볏섬을 거둬들이는 최참판댁의 부를 인정한다. 그 재력과 권력이 농민들 생활에 미치기는 하나, 그러나 그들의 생활, 부의 축적과 권리의 공고함에 농민들은 관여하지 않는다. 그들의 인생은 농민들 자신의 인생 밖에 존재해 있기 때문이다. 굶주리고 헐벗어야 하는 흉년이 들지 않는 한, 수탈이 자심하지 않는 한 그 모든 것은 농민들의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가 대물림을 한 것이라고 해도 궁극적으로 자신의 생존에 필요하거나 생활에 도움되는 부라면 민중은 부자들의 권위를 인정해줄 것이다. 하지만 그 부가 민중의 희생과 굶주림으로 축적된 것이라면 부의 축적과 권리의 공고함은 수탈자의 탐욕으로 바뀌게 된다.

현명한 위정자는 그 빠둑빠둑한 마지막의 선을 알아서 농민을 곱게 잠재워두지만

어찌보면 국민의 투표를 통한 민주주의는 현명한 위정자가 되기위한 가이드라인를 제시했다고도 할 수 있다. 정기적인 투표와 선거를 통해 민중의 분노를 잠재우고 권력자의 기반을 유지하는 방법론이 되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식을, 부모를, 혹은 가장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그런 이별들을 쉬이 잊어버려야 하고 또 쉬이 잊어버린다.

나이가 먹을수록 내가 이별해야 하는 사람들 숫자도 늘어난다. 조부모님, 외조부모님, 큰아버님, 고모님. 어린 시절 추억이 남아있는 분들과 이별하며 그분과의 추억이 잊혀져 간다. 

그들은 그들 동류의 죽음이 아니어서, 옛이야기 속의 그 희한한 사람들의 일이어서 그들은 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통령이 총에 맞아 죽은 후, 그리고 전직 대통령이 낭떠러지에 뛰어 자살한 후,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소리내어 울었다. 그들 동류의 죽음이 아니어서 그러하였는가, 아니면 그들 동류였는데 안타까워서 그랬는가? 그들을 지켜줄 권력이 사라짐에 대한 두려움이었는가 아니면 그들의 쓴소리를 묵묵히 받아준데 대한 미안함때문인가? 

땅에는 봄의 입김이 서리고 강 기슭의 대숲이 한결 연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봄이 살포시 다가오면서 얼어붙었던 땅이 조금씩 깨어나고 대자연의 숨결에 숲속은 연한 빛깔을 띠기 시작한다. 봄 풍경 묘사가 아름다워 이 표현을 잡아두게 되었다.

비 갠 뒤의 햇빛은 유난히 맑다. 미나리밭이 눈에 띄게 푸르고 흐르는 도랑물을 햇빛이 희롱한다. 그 햇빛도 어느덧 꼬리를 감추었다. 바람이 거실거실 일기 시작했다.

봄비가 내린 후 내리쬐는 햇볕이 쬐는 늦은 오후다. 하늘 아래 푸르른 초목이 볕을 받아 더더욱 푸르게 다가온다. 흐르는 도랑물 따라 햇빛이 반짝거리가 구름에 가려 그 모습을 감춘다. 어디선가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풀을 눕힌다.

경사가 급한 북향의 산비탈에 바람이 휭휭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앙상하게 메마르고 키만 자란 소나무 가지 사이에 이 음지하고는 인연이 없을 것만 같은 푸른 하늘이 비쳐들어 있었다. 

소나무로 둘러싸인 깊은 산속,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며 휭휭 소리를 낸다. 소나무 가지 사이사이로 잦아든 햇볕이 나무 기둥 깊숙한 속살을 파고든다. 

앙상하게 여위고 키만 큰 소나무 가지 사이로 햇빛이 겨우 조금 기어들어왔다.

볕이라도 좋은 곳을 찾아 묻힐 곳을 만들면 좋으련만 그럴 여유가 없어서 메마르고 거친 땅에 사랑하는 이를 묻어야 할 때, 남은 이가 흘리는 눈물은 얼굴 적시는 눈물도 아니요 가슴적시는 눈물도 아니다. 떠나버린 이에 대한 미안함,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 무력감, 세상에서 버려진 외로움의 상처에서 나오는 피고름이다. 


토지를 읽으며 아련했던 지난 날의 상처를 되새김하는 것 같아 마음 한구석에서 괴로움이 스멀스멀 올라올때가 있다. 그 괴로움을 추억이라는 이름로 달래기에는 가슴 아픈 기억이기에... 가끔씩 밖에 나가 괴성이라도 지르며 땅을 박차고 뛰어가고 싶건만... 나는 오늘도 귀에 이어폰을 꽂고 아침일찍 산책을 나서며 마음을 달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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