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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토지 제3권 - 박경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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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토지 제3권 - 박경리

Barram 2021. 7. 16. 00:04

토지 제3권은 귀녀와 평산이의 죽음, 그리고 한차레 전염병이 휩쓸고 간 평사리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귀녀의 죽음과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접하는 강포수, 가족를 잃고 고향을 떠났지만 그리움에 사무쳐 다시 돌아온 한복이, 그리고 주눅이 든 그를 돌봐주는 마을 사람들, 돌아온 임이네를 보는 마을사람들의 다양한 시선, 전염병이 지나간 평사리의 모습과 변화, 조준구와 홍씨가 보여준 인간의 탐욕, 가족을 잃었지만 제련된 쇠처럼 단단해지는 서희의 마음, 나라를 잃은 후 자신의 사명과 그 정당성을 고뇌하는 이동진. 이 모든 것이 다양한 시선으로 서술되면서 인간 본성에 대한 고뇌를 일깨운다. 작가 박경리는 이 책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나. 힘없는 자들의 본성과 그들의 한을 서술한 것인가? 다른이의 손가락질을 받던 조준구가 권력을 가졌을때 나타내는 보상심리와 잔인한 본성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나의 어두운 기억을 일깨우며 현재 내 모습에 한없는 경계감을 가지게 해주는 문장이 많았다.


나무 껍질처럼 여위어서 방금 그 목숨의 불길이 꺼질 듯 싶었으나 귀녀에 대한 증오, 복수심이 겨우 삶을 지탱하는가 싶었다.

꿈과 희망만이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에 대한 처절한 증오와 복수심이 마음 속에 자리잡으면 그역시 삶을 꾸역꾸역 살아나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하나의 탄생은 하나의 죽음을 의미한다. 귀녀의 죽음, 그것은 강포수에게 범람하는 강물이었다. 강포수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이 흘러내려 가는 시뻘건 흙탕물이었다.

누군가의 합격은 누군가의 불합격이고 누군가의 성공은 누군가의 실패를 의미한다. 사람들과 경쟁하며 살아가는 이 사회에서는 말이다. 경쟁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실패한 사람 입장에서는,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그 실패가 어쩔 수 없이 흘러가는 시뻘건 흙탕물이 되어서는 안된다. 

밖에 나온 강포수는 담벼락에 머리를 처박고 짐승같이 울었다. 하늘에는 별이 깜박이고 있었다. 북두칠성이 뚜렷하게 나타나서 깜박이고 있었다.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을 발견한 후, 나는 밖에 나와 담벼락에 머리를 처박고 울음을 삼켰다. 펑펑 소리내어 울 수도 없어 가슴을 주먹으로 치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에 깜박이는 별을 바라보았다. 문득 별이 되어 어린 왕자처럼 이 곳 저 곳을 떠돌아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달 나는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사막에 있는 한 도시로 향했다. 그 곳에서도 밤하늘 별이 깜박이고 있었다.

술 취한 것처럼 희뿌옇게 번들거리는 하늘과 부풀대로 부푼 뭉게구름이 떠 있던 논물에는 수없는 파문이 일면서 하늘과 구름이 구겨지고 부글부글 흙물이 솟는다.

인적없는 고요한 논두렁길을 걸어가다보면 사람 인기척에 깜짝 놀라 물에 뛰어드는 개구리, 미꾸라지가 보인다. 잔잔했던 논물에 파동이 일고 흙물이 솟는다. 작가는 고요한 논물의 모습에 비친 하늘과 뭉게구름, 개구리, 미꾸라지가 인기척에 놀라 논물에 뛰어드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참 대단한 필력이다.

다만 함안댁이 죽고 보니 불쌍하기도 하려니와 맺고 끊고, 그 정갈한 성미가 본보기처럼 되어서 눈이 매롱매롱하게 살아 있는 임이네가 미웠던 것이다.

조그만 시골 사람들에게는 명분과 평판이 꽤 중요한 모양이다. 아니 한국이라는 좁은 사회에서 명분과 평판은 꽤 중요하다. 실리를 따져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사람은 다른이들에게 얄미운 시선을 받게 되다. 특히나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말이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사이가 참으로 모호한 이유중 하나인듯 싶다.

마음 달뜨고 세상이 온통 훤한 것 같아서 즐거웠다. 

알 수 없는 희망에 마음이 들뜬다. 세상이 모두 내 것만 같다. 승진했거나,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거나, 돈을 생각보다 많이 벌었거나 때이다. 서민은 조그만 것에 즐거워한다. 그 조그마한 것으로 즐겁게 해주는 것이 왜 어렵단 말인가.

햇볕 바른 언덕에 꾸부정하게 자라난 뽕나무 밑둥에는 흙이 녹아서 허물어지고, 겨우 뽕나무의 뿌리가 나머지 흙을 움켜잡고 있는 것 같았다. 

봄이 와서 얼었던 땅바닥이 보드랍게 풀리면서 속살을 드러낸다. 봄내음이 상큼하게 다가오면서 마음도 상쾌해지는 것 같다. 그런 봄날의 장면을 이렇게 뽕나무 모습을 통해 잘 표현했다.

아이들은 모두 너무 오랫동안 암담하고 비애에 가득 찬 집 속에 마음을 가두어놓고 있었다. 

나는 상가집이나 장례식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삶과 죽음이 오고 가는 순간, 그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가르쳐주는데 최고의 장소이겠지만 아이들의 해맑은 본성을 가두어놓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다. 하물며 오랫동안 상복을 입어야 했던 옛 시대에는 그것을 어떻게 감당했었겠는가.

양반들도 상것들의 업신여김을 당한다는, 어린애와도 같이 철없는 설움이 북받치는 것이다.

그렇다.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이다. 그 잘난 양반도 자신보다 아랫 것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면 설움이 올라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저변에는 자신의 타고난 신분 우위를 지키지 못한, 자신의 못남에 대한 설움이요, 자신이 아랫것에게 무조건 대접받아야 한다는 차별의식이 깔려있다.

돌대가리 속에 들어박혀 움직일 줄 모르는 그런 기억력이라고나 할까. 하늘 천 따아 지! 상체를 흔들며 배우기 시작한 천자문이 골수에 박혀 들어간 것처럼 후일 어른이 되어 얻은 지식도 그런식이어서 깨우침이나 비판의 여지없이 통째로 받아들였고 고스란히 그의 완고한 돌대가리 속에 사장되어왔었다. 그 완고함은 흔히들 있는 아집이나 자부하고는 다른 것이었다. 외곬에서 시작한 완고함이었다.

한마디로 인성이 좋은데 고지식하고 사고가 유연하지 못한 사람의 대표적인 인물은 김훈장이 아닌지 싶다. 문제는 인성이 좋고 좋지 않고를 떠나 스스로 진실을 바라보려는 노력이 없으니 다수의 의견에 쉽게 선동되고 권력집단의 하수인으로 전락되기 쉽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타인의 관점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며 자신이 흡수한 정보만을 가지고 제대로된 자기비판 없이 세상을 외곩수로 보기 쉽다. 어쩌면 다른 사람 이야기하듯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사람됨을 멸시하면서도 늘 답답한 심정의 말벗 없는 김훈장은 싫지 않게 그를 맞이했다.

친구가 없으니 사람됨됨이를 떠나 말벗을 할 수 있는 상대를 보면 반가운 법이다. 마치 한국에서는 어울리지도 않을 법한 사람들이 미국에서는 한인이라도 이유 하나만으로 잘 어울린다. 그러다가 맘에 들지 않는 점을 하나하나 발견해가기 시작한다. 서로 맘에 들지 않으니 뒷담화가 일상이 되고, 비난과 무시 섞인 뒷담화에 분노한 사람들이 서로 편을 갈라 싸운다. 이게 미국내 한인사회의 현실이다.

진리는 구국경세 (救國經世)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요 사실을 사실대로 밝혀내는 데 뜻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게요. 어느 시대의 어떤 사람이 진리를 깨치면 그것이 봉우리의 끝이요. 한 사람에서 두 사람 세 사람 거치는 동안 메아리가 조화를 부리듯이 제 소리 아닌 것이 되고 만다는게요.

한 시대를 풍미했고 찬양받던 사람도 세월이 지나면 재평가가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어디 사람뿐이던가. 역사도 마찬가지다. 설령 우리가 사실을 가지고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한사람에서 두사람 세사람 거치는 동안 메아리가 조화를 부리듯이 사실은 또다른 사실로 변모하고 만다. 그래서 객관적인 시각으로 불편한 진실을 마주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닌 듯 싶다.

참말이라는 것이 허황한 것 같기도 하고 참말이 쉬울 듯하면서 쉽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참되게 산다는 일이 반드시 옳게 산다는 것도 아닐 성싶고 아주 적은 사람들이 옳게들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참되게 산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 같고.... 착하고 악하다는 것과도 다른 뜻이 있는 듯 싶고,

참되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 진실되게 산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인가? 내 가치관이 다른 이의 입장에서는 악이 될 수도 있고 그들의 가치관이 나에게 악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스스로의 가치관을 가지고 다른 이를 판단할때 우리 가치관은 얼마나 떳떳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때문에 다른이에 대해 말하는 것이 한없이 조심스러워지다가도 가끔씩 치밀어오르는 분노는 어찌할 수 없다.

물가에서나 혹은 길가에서 끈질기게 흙을 움켜쥐고 목을 쳐드는 잡풀같이, 비가 쏟아지면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문적문적 썩어가다가 속잎이 트고 다시 자라는 풀, 가뭄이 계속되어 강물이 마르고 땅이 갈라지고 그래도 물기를 꼭 껴안고서 견디어내는 잡풀.

잡풀처럼 살았다. 억새풀처럼 살았다. 그렇게 살아남고 이제 조금은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다른 이들는 잡풀처럼, 억새풀처럼 살아온 시간을 보지 않고 현재의 모습만을 보며 쉽게 판단하고 쉽게 이야기한다. 그런 이들을 보며 나는 그저 쓴 미소만 지울 뿐이다.

처음에는 고생이 견디기 어려웠고 세상을 원망도 했었으나 갈라진 논바닥이기보다 오히려 바위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픈 것도 없고 슬픈 것도 없었다.

실패의 연속, 인생의 낙오자가 된 기분, 다른이의 시선, 그 시선에 신경쓰는 나자신, 위로을 기대했던 이에게서 날라온 조롱과 비웃음, 그리고 그 정점의 순간... 나는 더이상 아픈 것도 슬픈 것도 없었다. 

꾸불꾸불 밀려오는 물굽이가 바닷가의 방죽을 치고 또 치는 것처럼 잇닿아 밀려오는 공상은 그에게 다시없이 감미로운 것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수많은 생각들은 마치 만화경같이 찬란하고 다양했다. 갖가지 빛깔이 있는가 하면 갖가지 소리가 들여오고 과거에서 미래까지 추억과 꿈은 마음대로 끝도 시작도 없이 그의 생각 속 넓은 공간을 비상하는 것이다.

가끔씩 서울에서 고향으로 내려가는 버스안에서 스쳐지나가는 창가 풍경을 보면 수많은 생각들이 같이 지나간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후회, 현재 내가 잘 하고 있나에 대한 의구심,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불안감이 뭉뚱그려 먹구름처럼 다가온다.

뿌옇게 서려 오르는 안개였으며 자신의 죄업마져 미망 속으로 꺼져들어가는 것을 느낀다.

나에게 상처를 준 이가 스스로 그의 죄업을 알고 있을까? 그 생각을 하다가 나는 나자신의 죄업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자문해본다. 나와 신뢰 혹은 혈육으로 맺어졌던 사람들에게 내가 지은 죄는 무엇인가. 스스로 자문하면서 내 죄업이 미망속으로 꺼져들어가는 것을 느낀다.

고마운 척, 눈물겨운 척할 수 있는 교활한 지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넘쳐흐르는 생명력, 조금만 땅이 걸고 짓밟지만 않으면 무섭게 자라나는 잡풀 같은 생명력은 교활한 지혜를 위해 여유를 주지 않았다 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잡풀같이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잡풀같은 생명력 아니 생존력을 못마땅해하며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짓밟는 또다른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생명력에 대해 관망만 하되 시샘하고 질투하는 또또 다른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사람들은 서로 짓밟고 시샘하고 살아남기 위해 처절하게 살아가고 그리고 그다음은 무엇일까. 시샘과 질투는 인간의 본성일까? 지나친 생명력이 자신을 압도할 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일까?

어깨로 바람을 끊듯 나가버린다.

보고 싶지 않은 이와 우연히 마주쳤을때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나누거나 무심히 어깨로 바람을 끊듯 지나쳐버린다. 나는 어떻게 행동했었나... 기억을 더듬어본다.

우러러보는 하늘에는 아직 푸른 기가 남아 있는 듯싶은데 별들이 영롱하게 반짝인다.

이른 밤하늘, 산너머 사라진 햇볕의 기운이 마지막으로 서리는 시간, 별들은 영롱하게 반짝이기 시작한다. 문득 내 인생이 왜이리도 풀리지 않은지 답답한 마음에 눈꼬리를 타고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린다. 20여년 전 어느날의 기억이다.

원망이란 희망이 있을 때에 생기는 마음이다.

원망이란 희망이 있을 때 생기더라도 그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아챘을 때 그 원망은 절망으로 바뀌고 결국 분노로 표출된다. 

죽는다는 말을 겁내고 있는 자기 자신의 소심을 가슴 치고 한탄하면서도 무서웠다.

죽고 싶다고 수없이 되뇌이면서 죽는다는 것을 아직도 겁내고 있는 내 자신이 한심했다. 하지만 진짜 죽어버릴 수도 있는 내 자신이 무서웠다.

깍아지른 듯 암벽과 잇닿은 강물은 그늘이 져서 한층 짙게 일렁이고 있었다.

노젓는 배를 타고 강을 가로지른다. 깍아지른 듯한 암벽아래 그늘이 져서 한층 짙게 일렁이는 강물은 내 가슴을 일렁인다. 갑자기 눈물이 강물처럼 눈가를 타고 흘러내린다. 

큰 목청이 맑은 공기를 흔들며 울려왔다.

명절때마다 성묘를 위해 아버지와 함께 선산에 있는 조부모님 산소를 찾았다. 고조 부모님 산소는 산등성이 훨씬 위쪽에 있었다. 어릴 적 산올라가는 것이 힘들어 뒤처지면 앞서가던 아버지는 큰 목소리로 빨리 오라 재촉하셨다. 내 이름을 부르던 그 목소리는 맑은 공기를 흔들려 울려왔다.

이윽고 낚싯대가 푸른 하늘에 원을 그리며 치올라갔다.

아버지는 낚시하시는 것을 좋아하셨다. 바다 낚시보다는 주말을 이용해 교외 호숫가에 가셔서 민물낚시를 하시는데 작은 고기는 그냥 놓아주고 가끔씩 잡히는 큰 고기를 집으로 가져오셨다. 물론 대부분 빈손으로 오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낚싯대를 한바퀴 돌려 휙 던지면 푸르른 하늘에 원을 그리며 치올라갔다. 가끔씩 휘잉 바람 가르는 소리도 났다. 그 낚시는 번민을 저 하늘에 휙 날려버리고 평안과 희망을 걷어올리는 낚시가 아니었나 싶다.

무력한 백성들은 신비한 힘에 대한 기대 없이는 어떤 희망도 가져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 속에서 기적이 일어나길 바란 적이 몇 번이던가. 슬프게도 기적은 일으나지 않았고 무력감은 계속되는 패배감과 더불어 사람을 절망의 나락으로 빠뜨린다. 그 나락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죽음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악마의 손길을 잡을 것인가. 나는 그렇게 죽음을 등에 이고 내 영혼을 담보로 악마처럼 살아야했다.

복잡한 마음을 이해하기는 하나 그의 슬픔을 공감할 수는 없었다.

이해와 공감은 다른 것인가. 이해는 머리로 하는 것이고 공감은 가슴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인가. 하지만 이해 없는 공감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공감 없는 이해는 가능한가. 이해하는 대상과 공감하는 대상이 다르기 때문에 이해는 하지만 공감을 못하는 것인가. 여러가지 생각이 따라온다. 

개울 얼음을 녹인 이른 봄의 바람이 솔잎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화창한 봄 3월, 개강 직후 대학 캠퍼스가 생각난다. 찬 봄바람이 새로 돋은 나무 잎파리를 흔들며 몸에 부딪혀오면 잠시 눈을 감고  숨을 들이쉰다. 찬 내음이 가슴 깊숙히 들어가며 겨울내 잠들어있던 첫사랑의 기억을 들깨운다.

몸과 마음은 사슬에서 풀려나지 못한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갑작스런 일을 당하거나 소식을 들었을때 마치 세상이 정지되어버린 듯한 착각에 빠진다. 몸과 마음이 사슬에서 풀려나지 못한 것처럼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겨울의 강물은 추위에 거칠어진 사람의 살갗 비슷하다. 잘게 이는 물결은 돋아난 소름같이, 그리고 떨고 있는 듯 보였다. 암록색 비취처럼 아름다웠던 여름날의 물빛은 삭막한 청회색으로 변하여 마음에 절망을 안겨준다.

겨울강물 뿐만아니라 겨울바다 역시 추위에 거칠어진 사람의 살갗 같다. 왠지 모를 슬픔이 몰려와 여기저기 부딪히면 온 몸에 소름이 돋혀 바들바들 떠는 갯바위마냥 꿈도 희망도 그렇게 차가와져간다.

겨울의 햇빛은 살얼음같이 가냘픈 것이기는 했으나 나뭇잎을 다 떨어낸 밋밋한 잡목은 햇볕을 크게 방해하지는 않았다. 

매서운 겨울바람에 몸을 움츠리다 얼굴을 따스히 감싸주는 햇볕 하늘을 바라본다. 추운 날씨 속 햇빛 한줄기는 엄마 손길처럼 내 빰을 어루만지며 이제는 괜찮아라고 속삭여준다.

나라의 수난이 이동진 개인의 비극으로서 밀착해오지 않았던 것만은 사실이다.

나라의 어려움이 내 개인의 비극으로 다가오기는 쉽지 않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개인의 비극을 나라의 어려움 탓으로 돌리기는 쉽다. 학교를 꾸역꾸역 졸업하여 취업하려는데 IMF가 터져 나라 재정이 박살났다. 결국 취업길이 막혀 몇 해를 백수로 지내야 했다. 그러다 사업을 했는데 또다시 금융위기가 터져 사업을 말아먹고 탈탈 털려 빚쟁이가 되었다. 계속되는 스트레스로 술과 술주정이 늘었고 알게모르게 가정폭력도 늘었다. 결국 아내에게 이혼당하고 아이들과도 헤어졌다. 건강을 챙기지 못해 뇌졸증으로 쓰러져 일흔이 넘은 부모님에게 아직도 의지하고 산다. 아니 죽지 못해 산다. 내 아는 지인의 이야기다. 이 모든 것은 나라의 수난이 개인의 비극으로 밀착된 것인가... 아니면 개인의 비극이 나라의 수난때문에 시작되었는다는 변명일 뿐인가.

자기 자신은 무엇이며 겨레란 또 무엇이며 국토란 무엇인가 하고 자신과 연대되는 대상을 향한 감정을 캐보기에 이르렀다. 그는 냉혹하게 국가와 황실을 새로운 각도에서 인식하여 했다. 시베리아 벌판에 우뚝 선 자기 그림자, 한 인간의 모습을 처음 만난 듯 싶었고 군주의 권좌의 부당성을 깨달았다. 국가나 민족의 관념도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불행한 이성, 그 불행한 이성이 마음속에 터전을 잡으려 했을 때 그러나 감정은 창을 들고 일어서서 아우성을 치며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나는 무엇이며 내가 속했던 집단은 무엇이며 한국이란 나라는 무엇인가 하고 나와 연대되는 대상을 향한 감정을 캐본다. 내가 처음 마주했던 것은 나자신을 새로운 각도에서 인식하는 일이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국땅에 서있는 나의 그림자를 지켜보며 나라는 존재를 처음 인식했고 한때  내주변에 있었던 사람들과 조직의 부당성을 깨달았다. 불행한 이성이 마음에 터전을 잡으며 감정은 지나간 과거에 사정없이 칼을 휘두르면서 과거의 나를 산산조각내버렸다.

낯선 산야와 인종들 속에 초라한 자기 모습을 내려다보며 한낱 과객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역시 비웃었던 것이다.

결국 내 앞가림 하지 못했던 과거를 마주보고 낯선 땅과 인종들 속에서 초라한 내 모습을 내려다보며 나라는 존재는 한낱 과객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비웃었던 것이다.

방 안에는 백동 촛대에 눈물을 흘리며 촛불이 타고 있었다.

촛대에 눈물을 흘리며 촛불이 타고 있었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그다지 낯설게 들리지 않는 표현. 그냥 마음 속에 간직하고 싶은 표현이어서 이렇게 담아보았다.

모욕을 감내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욕망을 위해 광맥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결코 놓치지 않으리라는 안간힘, 그것이 전부였다.

살아남으려는 욕망도 욕망인가. 나는 이 낯선 땅에서 살아남으려는 욕망을 위해 모욕과 수치심을 감내하는데 이제는 익숙해져버렸다.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존심이 밥을 먹여주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모욕도, 수치심도 내가 내자신을 챙길 수 있을때 가질 수 있는 사치스러운 감정일 뿐이다.

표정은 삭막하였고 도사리는 맹수의 자세 같은 투지에 차 있었다.

낯선 곳에서 자리를 조금씩 잡아가고 표정은 삭막해지고 어떤 도전에도 맞설 수 있는 맹수가 되어 하루하루 살아가게 된다.

오히려 얼쩡얼쩡 관망하는 태도에 대해서 보다 큰 증오와 철저한 경계를 나타내었다.

얼쩡얼쩡 관망하는 것은 기회를 엿봐 이득을 취하거나 극대화하려는 인간의 본능이다. 다만 내 태도에 결정을 내린 후 나에게 향하는 증오와 경계는 감당할 각오가 되어있어야 한다.

일반 서민들은 여전히 권위를 무서워하고 또 외면하려 한다. 없는 사람들은 언제나 가진 자들에 대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힘없는 자들은 힘있는 자들에게 핍박받고 그나마 가진 것을 탈취당할까봐, 무식한 자들은 유식한 자들에게 이용만 당하고 무시와 조롱을 당할까 하는 그런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힘과 지식의 권위를 무서워하고 외면하려 한다.

투명한 하늘 기슭에 새빨갛게 탄 구름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머물러 있었다. 그것도 잠시, 어느새 사방은 어둠이 서서히 내려 덮인다.

가슴은 시커멓게 타들어가도록 답답한데 위로의 말은 못해줄 망정 조롱과 무시로 일관한다. 어느새 내 마음은 어두컴컴한 밤이 되어 구원을 찾아 헤매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내마음을 알아달라는 욕구는 노을에 새빨갛게 타버린 구름처럼 분노로 변한다. 그것도 잠시 사방으로 어둠으로 덮이듯 절망과 체념에 사로잡히고 만다.

발길을 돌려놓은 뒤통수를 봉기 목소리가 쫓아와서 사정없이 내리친다.

"못난 놈!!" 내가 원하는 것을 무엇인지 스스로 고뇌하는 것 뿐인데, 발길을 돌려놓은 뒤통수를 그 사람 목소리가 쫓아와서 사정없이 내리친다. '그러는 당신은 얼마나 대단하시길래 그런 말씀을 함부로 하십니까'라는 말을 속으로 삼키며 그 사람의 사무실을 나선다.

거복이의 행실은 한이 맺힌 곳에 또 한을 맺게 하는 슬픔이었다.

내 상황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니가 잘 해 임마 쓸데없는 생각 말고!!"라고 함부로 되뇌끼는 것은 한이 맺힌 곳에 또 한을 맺게 하는 슬픔이었다. 


지나친 솔직함으로 이 책을 대하는 것이 한없이 어렵게 느껴진다. 이따끔 가슴에 부딪혀 오는 문장들에 마음이 먹먹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재 나자신을 경계하려는 내 스스로 보호본능인 것인가 아니면 아직도 과거에 얽매인 내 한풀이인가. 쉽지 않은 독서이자 필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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