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rram's Life
[독후감] 토지 제4권 - 박경리 본문
토지 제4권을 읽으며 나는 1900년대 초반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던 당시 지식인들에 대한 작가 박경리의 여과없는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정신문화의 종말을 고하고 물질문명으로 전환기를 맞고 있던 조선이 일본에 굴복하던 시기, 지식인들은 스스로의 지식이 부족하여 실천하지 못한 자, 지식은 충분하나 자신의 안위때문에 실천하지 않은 자, 변화의 물결에 탑승하여 자기탐욕을 채우고자 다른이의 삶을 수탈하는 자, 사리사욕을 위해 양심따위는 팔아버리고 권력자의 하수인이 되는 자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그런 세상을 인지하고 주도할 정치적 무대나 능력이 없던 서민들, 조선의 토종세력들은 외세세력에 맞서 싸우기도 하고 굴복하기도 하지만 그들 나름의 유교사랑, 삼강오륜을 지켜가며 우리의 정신을 이어갔으니 이것을 패배라 하더라도 패배라 부르기는 힘들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박경리는 평사리 풍경과 농민들 삶과 심리를 잘 표현했다. 최씨집안 재물이 조준구일가에 넘어가는 상황을 빗대어 당시 조선이 일본에게 나라를 뺏기는 상황을 묘사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핍박받는 최씨집안 하인들과 평사리 농민들의 애환을 잘 그려놓았다. 서희의 분노와 증오심이 남달리 내 가슴에 와닿던 것은 왜일까? 이제는 재가 되어 날아갔을법만도 한데 아직도 내 가슴속에는 분노와 증오라는 불씨가 남아있는가? 여러가지 생각이 들게 하는 부분이었다.
점심때가 지나고 중참 때도 지났는데 해는 아직 많이 남아서 행랑뜰에는 뜨거운 여름 햇볕이 튀고 있었다. 처마의 그늘이 겨우 우물가 쪽으로 다가서려 한다.
침대에 누워 조금 쉰다는 것이 깜빡 잠이 들었나보다. 일어나보니 벌써 저녁이 다가오는 늦은 오후시간. 한여름 해는 아직 많이 남아서 뒷뜰에는 뜨거운 여름 햇볕에 잔디밭이 진초록을 강하게 내뿜는다. 집지붕 그늘이 뒷 뜰 구석에 있는 라임나무에 다가서려 한다.
친일내각을 내세워 아무리 제도를 고쳐보아야 오백 년을 구석구석까지 배어든 사상은 졸지간에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정권교체를 통해 아무리 제도를 고쳐보아야 일백년 구석구석까지 손길이 닿아있는 기득권과 그들의 영향은 졸지간에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 나라는 법률가와 의사의 나라가 아닌 민중의 나라이며 민중이 개돼지 취급 당하지 않는 나라일 것인데 조금 배웠다는 이유로, 조금 더 가졌다는 이유로 사람이 사람을 핍박하는 것이 어찌 정당한 일이란 말인가.
자신들을 신비스런 자연 그 일부로 간주하고 영혼 깊은 곳은 무종교 무신앙의 자연 그 자체였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적어도 서방 외세 세력과 함께 들어온 종교에 대해 작가 박경리는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다.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성격, 편견, 종교 싸움의 유혈. 이 모든 것은 한국 전통 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유교와 불교가 무속사상과 같이 공존하고 산신이든 나무신이든 처용이든 모든 것이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사람은 그 자신을 신비스런 자연 일부로 보면서 그 영혼으로 미약한 자신을 재앙으로부터 지키고 천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신을 다스리려했을 것이다. 혹자는 그것을 미신이라 치부할지 모르나 난 적어도 그런 정신세계에 대하여 경외심을 표현하고 싶다.
신령에 관한 행산는 대행자인 무격들에게 맡겨버리고 실행하는 것은 삼강오륜의 생활방식으로써 신비와 운명에 자신들 의지를 위탁하였으면서도 오로지 단 하나의 이성이며 실천과 노력을 도모하는 것이 유교적 인생관은 아니었었는지. 식자들뿐만 아니라 서민들이 즐겨 쓰는 도리라는 말이 있는데 자식 된 도리, 부모 된 도리, 형제의 도리, 친구의 도리, 백성의 도리, 이 도리야말로 생활의 규범이다.
어쩌면 삼강오륜에 기반을 유교적 도리가 우리 옛 조상, 할아버지 할버님, 부모님 세대까지 마음 속 깊이 뿌리내려 우리 생활의 기본적인 규범이 되었는지 모른다. 아마도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 아닐까.
역사는 진정 정신문화의 종말을 고하고 물질문명의 흥성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저 푸른 하늘을 흐르는 구름을 보며 흙을 빚던 사기장이의 천심은 가고 나사못을 깎는 시대가 오고 있다. 이끼 낀 돌담 곁에 의관을 차려입고 유유히 팔자걸음으로 가던 선비의 풍도는 가고 쩔렁거리는 사벨 소리와 흙먼지 일으키며 군화 소리가 오고 있다. 물질문명의 시대는 흉기부터 앞장세우며 오고 있는 것이다.
정신문화의 시대는 척박한 가난의 살림을 안고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오고 있는 자는 또 갈 것이요, 가고 있는 자는 다시 올 것이다. 다시 올 때까지 산맥과 지류는 마멸되고 고갈되었어도 들판은 남아 명맥을 이을 것이다. 그리고 한 시대는 가고 한 시대의 사람도 가고 사물만이 남을 것이다. 이 사물에서 역사는 비로소 정확한 자를 들고 인간정신을 측정할 것이며 공명정대한 역학적 기간으로 귀납될 것이다. 그리고 인간존엄을 찾게 될 후일 사가는 이 시대의 승리를 영광의 승리라 하지는 않을 것이다. 패배를 치욕의 패배라 하지도 않을 것이다.
물질을 앞선 식민제국주의는 두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이미 그 허상과 잔혹함을 일깨워주었다. 지금은 어떠한가. 물질 만능 편의주의로 자연은 무시되고 능력우선주의로 약자의 기본권이 침해되며 자유라는 이름아래 차별이 정당화된다. 이제 인간은 태초부터 자연과 인간이외 생물을 파괴하는 단계를 지나 이제는 스스로를 파괴하는 단계에 와있는 것인가. 작가 박경리는 상당한 지면을 할애해 물질문명의 시대를 비판하면서 사람이 우선이라는 그녀의 생각을 과감히 표출하고 있다.
숲의 나뭇잎들이 희끄무레한 뒤 앞을 뒤집어 보이며 방향을 잡지 못한 바람에 시달리며 흔들린다.
사나운 소낙비가 내리기 전 거센 바람이 불면서 여기저기 나무들이 아우성치기 시작한다. 비가 내리기전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 나는 걸음을 빨리하기 시작했다. 인적도 점점 뜸해지면서 마음은 조급해져만 간다. 오래전 제주도에 배낭여행을 가서 겪은 경험이 생각나 이렇게 적어보았다.
바람이 없는 아침 강물은 깊이 잠들었다가 미소하며 깨어난 아기얼굴처럼 맑고 순해 보였다.
밤낚시가 거의 끝나간다. 새벽녘 물안개가 아직도 강가를 뒤덮었고 동이 조금씩 터오기 시작한다. 바람이 없는 아침 강물위로 낚시찌는 너울거리는 것이 마치 미소하며 깨어난 아기가 아장아장 걸어가는 것만 같다.
그런가 하면 끝도 없고 시작도 없는 망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서면서 의식을 낯선 곳으로 끌고 간다.
나는 망상이 많은 아이였다. 수업시간에 나만의 상상에 빠져 다른 생각이 하곤 했다. 나이 먹어서도 그런 습관이 고쳐지지 않아 세미나를 가서도, 회의를 하면서도 가끔씩 끝도 없고 시작도 없는 망상이 꼬리에 꼬리르 물고 나서면서 내 마음을 낯선 곳으로 끌고 가곤 한다.
망자의 극락왕생은 바람이요 뜬구름같이 덧없는 인연의 슬픔이다.
표현이 너무 마음에 들어 이렇게 담아보았다. 망자의 극락왕생은 바람이요 뜬구름같이 덧없는 인연의 슬픔인 것을... 가버린 이에게 저세상에서 잘 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다 부질 없는 일이다. 이세상과 저세상이 갈라놓은 이별의 슬픔 속에서 가버린 이에 대한 좋은 추억과 아련한 심정으로 잊을듯 말듯 내 인생을 사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어둠이 오기 전에 달이 떴다. 사라져야할 밝음과 나타난 달빛이 서로 겨루듯 잠시 사방은 옅은 회갈색으로 흐리더니 여광은 아주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달은 산허리에서 솟아올랐다. 보름달은 은가루 같은 보송한 빛을 뿌린다. 밤이 깊어지면서 은가루는 물기를 머금기 시작했고 숲이 야기에 식어갔을때 푸르름을 뿜어내며 달빛은 출렁이는 것이었다. 산사 뜨락의 도라지꽃, 달맞이꽃, 창백한 꽃들은 애잔하게 고개를 쳐들며 혹은 엷게 스치는 바람에 흔들리고 나무그림자도 흔들리고 개울물 흐르는 소리, 부엉이 울음이 들려온다. 처창한 적막은 저승일까 이승일까.
초저녁 햇빛의 기운이 아직 남아있는데 달빛이 벌써 기지개를 편다. 죽어가는 햇빛과 어둠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달빛 사이에는 내 삶의 마지막순간과 그 후 펼쳐질 모습이 중첩되어 비추어주는 것만 같다. 낮에 보이던 것이 밤에는 전혀 다른 것으로 그 모습을 바꿔 다가오듯이 내가 떠난 후 나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도 추억도 다른 모습으로 다가올 것인가? 나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무엇을 준비하고 담담히 죽음을 맞이해야 할까.
인생 육십이 풀잎의 이슬같다.
100여년 전에는 인생 육십이면 살만큼 살았다고 여겼나보다. 조만간 하늘로 날아가버릴 풀잎의 이슬처럼 말이다. 하긴 지금은 아직도 청춘이라고 말하지만 말이다.
달은 정말 미치도록 밝다. 나뭇가지와 나뭇가지의 짙은 그림자가 바람에 일렁인다.
늦은 밤 잠 못이루지 못해 창문을 열면 어두운 밤하늘에 미치도록 밝은 달을 마주하게 된다. 도시 빌딩 사이사이 빛나는 십자가 불빛에 가로수 나뭇가지는 바람에 일렁이며 저마다의 소리를 지른다. 나는 왜이리 잠을 못이루는 것일까? 이 적막한 도시에서 나역시도 저 가로수처럼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일까? 답답한 마음이 가슴을 찌른다.
"제가끔 사정이 있는데... 사람이 어떻게 할 말 다하고 삽니까?"
참 기본적인 것인데 우리는 이것을 무시하고 산다. 각각 제나름대로 사정이 있는 법인데 아무 말하지 않는다고 괜찮은 줄 알고 남의 일에 대해 쉽게 자기 생각을 이야기한다. 어쩌면 이것이 나자신를 침묵의 늪으로 몰아넣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줄기차게 넘쳐흐르던 감정들은 싸늘한 재가 되어 핏줄을 흔들어주는 힘이 없는 것이다.
사랑도, 분노도, 줄기차게 넘쳐흐르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싸늘한 재가 되어 바람에 흩날려버리고 텅빈 마음 속에는 지난날 아련한 추억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생활의 무게를 떠밀어버릴 수 없는, 그리고 그 무게와 더불어 짐짝같은 자기 모습을 보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날 거울속의 내모습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하루하루 가족과 직장의 챗바퀴속에서 정신없이 살아가는 생활의 무게와 더불어 세월의 무게마져 짊어든 지게꾼의 얼굴이 보인다. 나도 이제는 나이먹은 티가 나는구나 하는 한숨섞인 자조가 나온다.
꿈이 깨었을때 용이는 죽을 무렵의 최치수 얼굴을 떠올려보려 했으나 희미하여 구름 잡는 듯 종내 또렷이 기억해낼 수 없었다.
꿈이라는 것이 항상 그렇다. 잠들어 꿈을 꿀때는 그 상황을 뚜렷히 인지한 듯 하면서도 일어나면 꿈에서 나온 사람과 주변에 펼치친 환경이 희미하여 구름잡는 듯 또렷이 기억할 수 없다.
세정에 밝고 처세에 능란하며 제반사에 형통하다 하여 우이(牛耳)에 있는 사람들이 도금된 자신들을 높이되 진토 속에 묻힌 옥을 모른다는 것은 그 자신들이 옥의 동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정(世情)이란 세상사람들의 인심을 의미하고 제반사란 어떤 것과 관련된 모든일, 여기에서는 세상만사를 의미한다. 우이(牛耳)란 어떤 일이나 단체에서 으뜸인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세상풍파를 다 겪고 나름 성공한 삶을 살면서 자신을 치장하고 남들 앞에서 자신이 으뜸이라는 착각에 빠진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주변사람 입장과 처지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으며 혹시라도 자신보다 나은 사람이 접근해오는 것을 무시하고 차단한다. 자신은 진주의 동류가 아니기에 흙속에 묻힌 진주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에 대한 진실, 자신이 남보다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무서워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것이 우리나라 지식인들의 가장 큰 문제가 아닐까?
햇살은 두텁지만 늦가을의 공기는 차다.
날씨에 대한 묘사가 좋아 그냥 필사해보았다. 가을 햇살이 아직은 강렬하지만 공기가 차갑다. 혹독한 겨울이 다가오고 있음을 암시해주는 듯 하다.
봄의 화창한 날씨를, 땅이 터지면서 토실토실한 움이 돋아나며 아지랑이가 강기슭을 흔들어주고
바람이 설렁한 늦가을 날씨, 화창한 봄날씨와 풍경을 상상하는 병수. 그 상상을 통해 사람들에게 따뜻한 인간미를 갈구하는 병수의 속마음을 엿볼 수 있다.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조금만 너그러워지면 우리 인생은 봄날씨처럼 화창하고 평안할 것을, 무엇때문에 설렁한 바람부는 관계가 되어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늘과 땅덩어리는 끝과 끝을 꽉 물려놓은 것처럼 몇천 몇만의 겹을 그러하였는지 완강하게 팽팽하게 정지하고 있었다. 세월은 도시 어느 통로를 거쳐서 지나가고 있는 것일까.
겁(劫)이란 계산할 수 없는 무한히 긴 시간을 말한다. 머나먼 이국땅 푸른 하늘과 누런 땅이 서로 맞닿아있는 대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내 몸이 조금씩 늙어가고, 내 마음이 조금씩 약해지는데, 고향과 그곳 사람들은 얼마나 변했을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상의 풍경은 몇만의 겁(劫)을 그러하는지 팽팽하게 정지하고 있다.
세월은 바람일까? 바람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을 어디로 자꾸 몰고 가는 걸까?
세월도 인생도 바람이 아닐까. 우리의 삶은 바람따라 세월과 같이 흘러만 갔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이 내가 원하는 방향이었을까? 내가 원하던 바람이었나. 대답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질문이 이어진다.
말없는 자연과 마주하고 있으면 샘처럼 온갖 공상이 솟아나 그를 즐겁게 해준다. 슬픈 일을 생각할 때도 슬프지 않다.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과 웅장한 대자연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자연속 일부가 되어 살아왔던 모든 생물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나에게 해주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 상상속에서 나는 즐거운 이야기를 듣고 또 듣고 상긋한 미소로 답변한다. 그러면 나의 슬픈 기억도 내 인생 추억이 되어 나를 보듬아주는 것 같다.
맵고 찬 바람이 마음속 깊은 곳을 거슬러 오른다.
마음속을 후벼대는 칼바람이 가슴 속 깊이 여기저기 불어닥친 적이 있었던가.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면서 마음속 칼바람이 나를 휘저어놓을때 나는 바위터에 앉아 한숨을 쉰다. 한때 즐겨피웠던 담배연기를 내뿜듯, 그렇게 마음속 칼바람을 불어내고 고독한 내자신을 마주한다.
사람의 공통 심리였다. 꼭히 믿는 것도 아니면서 즐거움을 위해 믿어보는 것이다. 희망이 적은 그들의 감정적 사치였을 것이다.
국가대표 야구 또는 축구경기를 볼때 가망없는 스코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뜨지 못하고 경기를 계속 지켜보는 심리라고나 할까? 희망없는 일이라고 이길지 모른다는 그런 기적을 상상해보며 믿어보는 것이다.
외톨박이가 되어 헤매거나 혹은 병들거나 상처받아 힘이 약해진 맹수는 유독 사납다.
나이는 먹어가는데 뜻대로 되는 일은 없고 주변 사람들에게마져 배신감을 느꼈을때 감정은 날카로워지고 사나워지는 법이다. 그럴때는 철저한 고독 속에 내 자신과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며 글을 쓰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래서 나는 이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자기 자신을 위해 왜곡된 현실만이 있을 뿐이다.
이성적인 눈으로 사실을 바라보아도 감정이 마음을 지배하면 자기 변명을 위한 왜곡된 현실만이 존재할 뿐이다.
후회는 덜미를 잡고 떠나지 않는다.
마음에도 없던 말을 감정에 치우쳐 모두 내뱉어버린 뒤 후회하면 무슨 소용이랴. 이미 나가버린 말이고 저질러버린 행동인데... 그저 현실을 인정하고 내자신을 내려놓고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는 수 밖에 없다.
내리막길을 내려가는데 거슬러 올라오는 밤바람이 땀에 젖어 끈끈한 이마를 스치고 간다.그러나 땀을 계속 흘리고 있는 것처럼 끈끈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다.
후덥지근한 여름날씨 습기가 많아 항상 온 몸은 땀에 젖어 끈적한 느낌이다. 끈적끈적한 몸마냥 끈끈한 기억이 내 마음속에 달라붙어 우울함이 가시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무감동한 눈빛은 겨울 하늘처럼 차갑고 삭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희망도 없다. 삶의 목적도 확실치 않다. 존재의 이유도 모르겠다. 20여년전 가졌던 생각들. 그당시 나의 눈빛은 감정이 없고 차갑고 삭막하기만 했다. 나는 그때 어떤 모습이었나. 당시 자화상이 가물가물해지면서도 그 때 느낌만은 또렷이 다가온다.
그리움도 원망도 없이 끝없는 갈대숲을 헤치고 가는 여인의 모습이 떠오르다 사라질 뿐이다.갈대 숲은 때때로 진달래 숲으로 변하기도 한다. 혼미, 끝없는 갈대숲을, 진달래 숲을 더듬고 가는 혼미. 혼미는 혼미를 부르고 허무가 하나의 정열로써 고개를 든다.
그리움도 원망도 없이 끝없는 과거 기억 속 갈대숲을 헤치고 가는 내 모습이 떠오르다 사라진다. 갈대숲은 가시덩쿨이 되어 내 가슴을 사정없이 파고 들다가도 장미꽃 향기처럼 그리움으로 나를 유혹하기도 한다. 갈대숲에서 가시에 찔리면서도 장미꽃 향기에 혼미해진 정신을 가다듬으며 허무한 표정과 함께 그 허무에 대한 분노를 불태운다. 분노는 열정이 되어 현재 내가 하고 있는 무언가에 미치게 만들고 연료가 되어 계속 타들어간다. 이것이 내가 현재를 살아가는 원동력일까?
바람개비같이 돌고 있는 지나간 지상의 세월은 지금 없는 것이다. 진실로 없는 것이다. 자취없는 허무의 아가리였던 것이다.
내가 이렇게 살아온 삶은 아무것도 아닌 것일까.? 나라는 존재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였나. 내가 원하던 진실은 없는 것인가. 내가 원하던 모습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이렇게 살아왔는가. 결국 내 인생은 그저 자취없는 허무의 아가리였나?
백성들이란 믿을게 못 되네
백성만이 믿을 것이 못되는 것은 아니다. 나자신도 믿을게 못되고, 세상도 믿을게 못된다. 결국 삼라만상이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없으니 나자신에 너무 실망하지 말고 타인을 원망하지 말고 이 세상에 화내지 말고 그렇게 그러려니 하고 살자.
내가 내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고 남을 위하겠다는 것이 허욕이 아니고 뭐겠느냐?
매우 지엽적인 지식과 대중적인 분위기에 휩쓸려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분들, 자신 본분의 일은 망각하면서 사회운동이랍시고 사진찍어 SNS에 자랑스레 올리시는 분들... 당신들이 진정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정치를 하고 싶으신겁니까 아니면 당신의 과시욕을 채우기 위한 몸부림입니까? 아니면 그것이 당신의 진심입니까?
끝없는 싸움, 싸움의 회오리바람 속에 나를 잊고 싶은 게다. 그리고 죽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결국 끝없이 내자신을 의심하고 세상을 의심하고 그 의심속에서 진실이 무엇인지 탐구하고 의견이 다른 이들과 언쟁하고 토론하며 허구의 내 자신을 죽이고 진실된 나의 모습을 찾아가고 싶은게다. 그것이 내가 쌓아왔던 내자신의 모습에 종말을 고하더라도 말이다.
아픔이나 원한이나 그리움이나 인간사에서 그 모든 생각보다 더 깊고 큰 것이 있었습니다. 그게 허무가 아니옵니까? 아버님은 그 허무와 싸우셨습니다. 저에게는 지금 아픔도 없고 울음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고통도 없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지난 세월의 고통은 오히려 감수같이 달콤하게 여겨지니 말입니다.
어차피 이길 수 없는 싸움. 설령 이기더라도 이겼다고 말할 수 없는 싸움. 그 싸움에는 아픔도, 고통도, 환희도 없다. 어찌보면 살면서 겪는 고독, 고통, 절망, 회한은 죽음을 마주한 시간 앞에서 오히려 사탕처럼 달콤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달빛과 아직 남아 있는 황혼빛 아래 산과 강물과 마을이 조용히 누워 있다.
초저녁 남아있는 황혼 노을과 희미한 달빛이 교차하는 시간, 고요한 산과 강 그리고 사람의 흔적이 보이는 마을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시골 모습을 잘 묘사해놓아서 필사해보았다.
악은 악을 기피하는 법이다. 악의 생리를 알기 때문이다.악이란 정신적 욕망에서든 물질적 욕망에서든 간에 그릇된 정열이어서 우둔할밖에 없고 찢어잘길 수 있는 허위의 의상을 걸치고 있기 때문이다.
악은 어울리지 않는 욕망에서 시작하여 그릇된 정열로 허영심과 함께 나타나는 것일까? 그래서 악은 악을 서로 알아보고 서로 회피하면서도 조롱하고 무시하는 것일까? 악은 진실을 회피하는 것이 아닌 거부하는 마음과 몸짓일까? 아니면 회피하는 것도 악일까? 내가 한때 가졌었던 그리고 지금 가지고 있는 마음도 악일까? 그런 악에 맞서지 않고 회피하는 것은 비겁함인가 아니면 또다른 형태의 악인가?
날로 새롭고 날로 생생해지는 증오심, 서희가 완강한 침묵을 지키는 것은 자기 내외를 살해하려 했다는 홍씨의 말을 인정하기 위해서다.
지나간 과거를 잊고, 나에게 아픔을 주었던 이의 언행을 잊고, 내가 가졌던 분노와 증오를 이제 가라앉히려 해도, 가끔씩 갑자기 생생하게 떠오르는 기억은 분노와 증오심을 부추긴다. 그런 순간, 나는 완강한 침묵으로 마음의 동요를 짓누르며 내나름의 복수를 해본다. 그 분노와 증오심에 상관없이 오늘 하루 열심히 사는 것이다.
토지 제4권 마지막 부분은 숨가쁘게 전개되었다. 평사리 사람들의 조준구에 대한 반란, 서희의 침묵시위, 그리고 간도로의 탈출까지. 이 모든 것이 나의 삶에 투영되어 잔잔한 물결에 파동을 안겨주기도 하고 큰 물결이 되어 마음을 뒤집어 놓기도 했다. 그러한 감정의 변화가 나를 이 책에 더욱 몰입시켰는지도 모른다. 100여전의 이야기지만 오늘 내가 사는 삶에 많은 메세지를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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