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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토지 제5권 - 박경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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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토지 제5권 - 박경리

Barram 2021. 7. 21. 01:53

출처: 토지 5권 : 박경리 대하소설 (2부 1권) - 리디북스 (ridibooks.com)

토지 5권은 용정촌 대화재 이후 평사리에서 온 사람들 이야기로 시작한다. 젊고 고고한 분위기의 선비 이상현, 혈기 왕성한 성인이 된 김길상, 마흔이 넘어가는 나이의 이용, 세 남자들의 세상과 얽힌 고뇌와 번민을 쫓아 이야기는 흘러간다.

이상현은 아버지 이동진과 같이 독립운동에 뜻은 있으니 실천을 주저해하며 서희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지 못한다. 김길상은 서희에 대한 애정과 신분한계에 대한 현실자각이 충돌하면서 자신의 존재이유에 대해 끊임없이 갈등한다. 이용 역시 용정촌에서 전형적인 농사꾼으로서, 그리고 지아비와 아버지로서 역할을 다하지 못한 채 자기 정체성에 의문을 가지고 괴로워한다. 결국 이 세 남자 모두 도망을 간다. 이상현은 서희에게 거부당한 후 신학문을 배워보겠다는 마음에 경성을 거쳐 일본으로 떠난다. 길상은 일을 핑계삼아 서희를 떠나 회령에서 옥이네와 인연을 맺고자 한다. 이용은 농사꾼이 농사외에 무엇을 하겠냐며 월선이 있는 용정촌을 떠나 통포슬에서 여름은 소작농을 하고 겨울에는 벌목꾼이 된다. 작가 박경리가 세 남자들의 행보를 묘사하는 것을 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그녀는 왜 남자는 비참하고 어두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도망가버리는 비겁한 존재로 바라보았을까? 그녀에게 남자라는 존재는 그런 것이었을까? 나역시도 그런 남자일까? 여러가지 생각을 들게 하는 5권이었다.


제 혼자 입치레도 못하는 주제에, 길을 걷다가도 그 생각을 하면 세상이 좁아 보였다.

내 앞가림도 못하면서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수치심과 부끄럼움에 세상을 보던 시절이 생각난다. 그나마 젊은 시절 그런 시간을 보냈었다는 것에, 그리고 그런 환경에서 완벽히 도망칠 수 있었다는 것에 고마울 따름이다.

소심하게 남의 눈치를 살폈으며 항상 누군가가 자기 흉을 보고 욕을 하는 것 같은 강박이 그의 행동거지를 불한정하게 했다. 

항상 아는 이를 만나면 조심스레 나의 근황을 물어보는 태도에서, 그 눈빛에서 나는 그들이 내 뒤에서 내 흉을 보고 욕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싫어 사람 만나는 것을 기피하기 시작했다. 

혼자서 내내 마음속으로 싸움을 벌였던 것이다.

누군가와 말다툼을 하고 나서 그것이 마음 속에 남아 혼자서 내내 마음속으로 싸움을 벌인다. 그러다 이내 내마음이 지쳐버릴 것을 깨닫는다.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마음을 정리한 후 내가 느꼈던 것을 꾸밈없이 글로 적어본다. 아무런 치레 없이 감정이 나가는대로 적어본다. 그리고 쓴 글을 다시 읽어보며 여기저기 가지를 치기 시작한다. 그 마음은 음율이 되어 나를 위한 시가 된다.

제 일상의 문제는 근심 마십시요. 나이 이쯤 됐으면 조만간에 제 자신이 처리하게 되겠지요."

그 나이 먹고 아직도 뭐하는 짓이냐, 장가는 가지 않을거냐, 돈을 언제 벌것이냐, 언제까지 공부만 할것이냐 라는 수많은 참견덩어리들. 나의 20대 후반은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과다하게 해준 걱정(?)으로 가득찬 때였다. 그리고 나의 대답은 항상 똑같았다. "조만간 제가 알아서 결정하겠습니다"라고.

세상이 달라지고 곳이 달라졌다는 말씀을 드린다면 저는 비겁한 놈이 됩니다. 세상이 달라지지 않고 곳이 달라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억지를 쓰시는 일은 선비 체통에 어긋나는 일 아니겠습니까?"

세월이 이제 흘러 나도 나이를 먹었다고, 사는 나라가 달라 나도 변했다고, 이렇게 말하면 나는 궁색한 변명으로 일관하는 놈이 되어버리고 만다. 제 사는 곳을 떠나지 않고 자신만의 세월을 살아왔다하더라도 자기만의 가치관으로 억지를 쓰는 일은 나이먹은 연장자로서 체통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랴?

상처받은 짐승같이 영악한가 하면 체념하듯 한 그런 눈이 상현을 쳐다본다.

그런 눈. 그런 눈으로 나는 누구를 쳐다보았던가. 아니 누군가 나를 그런 눈으로 쳐다볼때 나는 어떤 기분이 들었던가.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이곳에 남아 있어야 하는지 마음은 방향을 잡지 못한 회오리바람, 모든 일을 체념해버리기에는 피가 뜨겁고 젊다. 그렇다고 무엇을 향해 돌진해 가기에는 신산을 맛본 일이 없는 나이 어린 서방님의 그 의지가 쇳덩이 같다 할 수는 없었다.

미국에서 학교를 마쳐가던 시절,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아니면 이 곳에 남아야하는지 마음의 방향을 잡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가기에는 아쉬움이 너무 많았다. 이 곳에 남아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돌진해가기에는 이미 먹어버린 나이가 부담스럽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는 마음으로 불확실한 도전을 선택했다는 것은 어쩌면 쇳덩이같았던 내 의지의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근원의 생명도 항구불멸이라면 근원의 생명이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도 없는 것이다. 다만 영원한 것이 어둠 속, 잠든 이 시각에도 쉬지않고 숨을 쉬고 있을 뿐이란 말인가. 저 하늘의 별도 숨을 쉬고 있고 거적으로 둘러진 움막 속에 잠든 사람들도 숨을 쉬고 날개를 접은 가냘픈 벌레들도 숨을 쉬고 한 뿌리 풀잎, 한 줌의 흙까지 영겁의 위대하고 묵중한 시간을 호흡하며 더불어 가고 있을 뿐이란 말인가.

사람들은 죽음을 싫어한다. 자신의 종말을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죽음을 싫어하기에 영혼이 있다고 믿고 그 영혼은 항구불멸이라 믿는다. 그리고 그 영혼을 신적인 존재가 구제하고 보호해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육체와 영혼이 구분되었다고 보는가? 육체가 없어지만 내 영혼이 살아갈 장소가 없어지는 것이다. 내가 죽으면 영혼도 바람에 흩날리는 재처럼 사라져버릴 것이다. 내 삶이 끝나면 새로운 생명이 들어와 그 자리를 채울 것이다. 생명의 영속성은 각기 다른 존재가 다른 시간에 존재함으로 생기는 것이다. 내 영혼도, 신을 믿어 그 영혼을 유지하고자 하는 내 욕심도, 항구불멸은 아닌 것이다. 그럼으로서 근원의 생명이 존재하고 죽음의 종말이 존재하고 모든 생명의 생로병사와 순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람의 맘이란 이상한 거라 좋은 일보다도 고생스럽던 일, 목숨이 오락가락했떤 일이 도리어 감회 깊게 생각된단 말이오."

고생스럽던 일, 생사가 왔다갔다 했던 일, 분노, 슬픔이 더 기억에 남는걸까? 그래서 우리는 낙관적인 사람을 비웃으며 현실적인 사람을 시기하고 자신의 슬픔과 분노에 갇혀 사는 것인가? 이것은 인간의 자연스런 속성인 것인가 아니면 삶 속에서 얻어지는 속성인 것일까?

일부러 동서문답 식의 말재간을 즐긴다.

불편한 대화를 피하기 위해 이런 말재간을 부릴 때가 있다. 알아도 모르는 척, 어찌 보면 상대방을 배려하는 차원하에서 하는 말재간이다. 가끔 상대방이 내가 동문서답하고 있다는 알면서도 그런 말장난을 할 때가 있다. 핀잔아닌 핀잔을 받을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자조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을때 그러는 경우도 있다. 

웃어도 그렇고 화를 내도 그렇고, 그건 제 얼굴이 아니란 말이야. 어디 남 모를 곳에다가 육신을 두고, 옳지, 이야기를 거꾸로 해야겠군. 어디 남 모를 곳에 제 마음을 놔두고 왔을 거라.

내 마음 속 이야기를 누구에게 터놓고 할 수 없는 환경에서 나의 표정은 웃어도 그렇고 화를 내도 그런 덤덤한 표정이 된다. 내 영혼이 마치 몸 속에서 빠져나가버린 마냥 좀비처럼 일상생활의 챗바퀴에 머무르는 것이다.

사리는 어찌 되었든 불행은 사리를 따져가며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세월이 오래되었고 숨가쁘게 닥쳐든 변동의 역속으로 낡은 기억이 되어버린 최치수 살해사건이 용이 마음 속에 뚜렷이 되살아나는 것도 결코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고.

불행은 내 상황을 봐주면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때 이랬었더라면 더 나아졌을텐데' 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그 불행이 나에게는 기회가 되어 스스로 부정했었던 내 속의 진실을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 이러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없을텐데'라는 불안한 안도감이 드는 경우가 더 많다. 

대패질하듯 세상을 천천히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내가 업으로 삼아 현재 하는 일에 내 인생을 녹여가며 천천히 살아가고 있다. 적어도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내 삶의 반은 성공했다고 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살고 있는가. 스스로 자문해본다.

여러분들은 편지를 쓰기 위해 글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셈을 하기 위해 글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싸우기 위해 글을 배우는 것입니다. 알아야만 싸울 수 있습니다. 알아야만 이길 수 있습니다.

왜 공부해야 하는가. 출세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싸우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다. 기득권층의 불합리와 지식인들의 허위의식을 상대로 투쟁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다. 그들이 공부하는 우리에게 공포심을 가지고 스스로 각성하여 조심하도록 만들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다. 싸워 이기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을 변화시키고 내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한 용기를 가지고 계속 공부하며 투쟁해야 한다.

불쌍한 인생들, 나는 죽는 기이 아입니다. 가는 기라요. 육신을 헌 옷같이 벗어부리믄 그만인데, 내사 마, 헐헐 날아서 가는 기라요. 뒤도 안 돌아보고 가는 기라요.

내 인생의 마지막을 윤보가 죽으며 남긴 말을 하면서 마치고 싶다. 나는 죽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그저 사라지는 것 뿐이다. 바람처럼 훨훨 날아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는 것이다.

응어리처럼 의혹의 덩어리가 부풀어 올라 숨이 막힐 것 같다. 눈앞에 바닥 모를 심연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꺼지지 않는 불길 같이 그 오랜 집념이 심연 속으로 꺼져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내 스스로 최선의 배팅과 노력을 했다고 생각하는데도 그 결실이 나오지 않을때 느끼는 그 기분.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나의 가치관이 잘못된 것일까? 내가 살아온 방식이 잘못된 것일까? 아니면 나라는 존재가 잘못된 것일까? '나'에 대한 의혹의 덩어리가 부풀어올라 내 숨통을 조인다.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내 인생, 그토록 집착해오던 목표와 삶의 가치가 같이 꺼져 들어가는 것만 같은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을 나는 어떻게 살아남은걸까. 

권위의 깃털을 온통 세우고 공작새처럼 화려한 우월감과 표범처럼 표독스런 자부심을 환기시키며 발목이 묶인 길상을 눈앞에 보기 위해 서희는 신앙 같은 자신의 직감에서 떨어져 나가려고 맹렬히 닻줄을 감아올린다.

나르시시즘(자기애)이 강한 사람이 다른 이에게 충분한 관심을 받지 못할 때 나타나는 심리일까? 우월감과 자부심에 빠져 살아온 이는 실패를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어떤 특정 사람에게 느끼는 우월감과 자부심이 무너졌을 경우 '네까짓게 감히?" 라는 감정과 더불어 화장을 벗고 맨얼굴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순간은 자신이 자신만의 내면세계에서 상대방을 어떻게 대해왔는지 여과없이 드러낸다. 상대방과의 관계를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마는 것이다.

자신의 가해행위는 당연한 것이지만 상대의 가해행위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얼마나 이기적인 생각인가.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허영의 사고방식인가. 나는 잘못해도 되는 존재이지만 당신은 잘못하면 안되는 존재라는, 자기를 부정하고 남을 부정하는 이중적인 사고방식이다.

호되게 넘어져서 일어나질 못하다가  겨우 땅을 밟고 일어선 것 같은 느낌이긴 했다. 전신에 멍이 들어 얼얼한 아픔이 상기도 계속되고 있지만 발바닥이 땅에 붙어 있다는 안도감에 심신이 가라앉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제는 두 번 다시 수렁 속에 빠져들어 가지는 않으리라 다짐하는 용이 머릿속에 불현듯 십 년 전의 일이 떠오른다.

삶의 항해와 세월의 물결속에서 바닥을 알 수 없는 심연에 빠졌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온 직후, 그 공포감과 안도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내 인생, 내 시간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다시는 그 수렁에 빠지지 않겠다는 각오와 그 수렁을 만나면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각오도 다져준다. 그러면서 내 눈은 더욱더 차가워지고 얼굴은 무표정해진다.

꿈은 토막토막이었고 잠도 토막토막이었다.

잠을 좀처럼 이루지 못하는 밤이 있다.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하여 깊은 한숨을 쉬면서 달랜다. 잠시 선 잠이 들어서려다 다시 달아나버린다. 몸은 피곤한데 눈이 감기면 어두운 기억의 토막들이 안구를 쉴새없이 때려댄다. 다시 눈을 뜬다. 꿈도 토막토막이요 잠도 토막토막이요 마치 내 머리도 토막토막 조각나버리는 것 같다.

마치 그림책처럼 한 장 한 장 책갈피를 넘길수록 선명해지는 추억의 알록달록한 풍경

추억이 방울방울 생각나는 그 순간을 정말 잘 묘사한 문장이어서 이렇게 필사해보았다. 50여년 전 이렇게 알록달록한 문장이 신선하게 내마음 속에 들어온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새까맣게 지워버렸던 불과 일 년이 못 되는 세월의 빛깔을 띠며 마음속에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아픔으로, 오욕으로...

지워버리고 싶어도 지울 수 없는 당시의 세월은 내 마음 속에서 항상 아픔으로, 회한으로, 휘몰아친다. 고요한 마음의 바다가 된 때가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세월의 빛깔아래 물결이 거세질때면 사나운 물갈퀴가 할퀴는 마냥 아픈 기억이 솓아오른다.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얼마나 큰 약점인가, 절망에서의 탈출 뒤에 온 희열이란 또 얼마나 서글픈 찰나인가. 빼앗길 그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겐 불안이 없다. 앞으로의 자기 운명에 대한 기대와 흥미가 과연 희망적인 것인지 그 어떤 실마리도 잡아보지 못한 채 방향도 알지 못한 채 악몽 속에 허덕여온 여자는 희망 그 자체를 겁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어쩌면 금녀에게는 절망 그 자체가 삶이었었는지 모른다. 순간 불꽃 튀기듯 뻗치어온 절망과의 대결, 그 긴박한 찰나 찰나가 삶의 증거였었는지도 모른다. 확실히 서러움이나 근심이나 불안은 절망의 덫으로부터 빠져나온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빼앗길 것이 없던 시절, 죽음을 생각했다. 죽음을 생각하니 불안도, 걱정도 없어졌다.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희망을 가진다는 것,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끊임없이 자신에게 가하는 희망고문 속에 언제까지 나를 얽매여 둘 것인가. 절망의 덫에서 탈출한 순간 환희를 잠시 느끼지만 그 뒤에 몰려오는 허무감, 그리고 다시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함께 몰려온다. 어쩌면 나에게는 절망 그 자체가 삶이었었는지 모른다. 그 절망과 대결해온 매 순간이 내 존재의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감정의 억제가 일상이었으니 이러고저러고 얄싹한 말발림을 삼가는 것

조선시대 사대부 집 여인에 요구되는 덕목이었나? 작가 박경리의 여성에 대한 전통적인 시각이 묻어나는 대목이었다. 어쩌면 우리나라 사회에서 윗사람이 충복 또는 오른팔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에 대한 덕목도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런 충복을 곁에 두는 것도 윗사람의 덕에 좌지우지되겠지만. 그래서 인복은 그 사람의 덕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하던가.

웃으신 일이 없었지만 웃음보다 더 정을 느끼게 하는 슬픔이 있었습니다.

길상이 오래전 그가 바라본 윤씨 부인을 말하면서 나온 표현이다. 그런 사람이 있다. 잘 웃는 표정을 보이진 않지만 웃음보다 더 정을 느끼게 하는 슬픔이 내재된 눈빛을 가진 사람. 상황에 따라 우리는 그런 사람이 되기도 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깨닫게 되는 것일까.

자기 자신을 슬퍼할 줄 모르고 불쌍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없이 어찌 남을 위해 슬퍼하겠습니까. 배고파본 사람만이 배고픈 것을 알듯이 말입니다. 아파본 사람만이 아픔을 알듯이 말입니다.

내 자신 슬픔만 알고 내 자신만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있다. 그런 마음을 가져도 남을 위해 슬퍼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배고파보았어도 다른 사람 배고픈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외면하는 사람이 있다. 아파보았어도 남의 아픔을 외면하듯 말이다. 그렇게 사람은 간사한 동물이다.

나는 누구든 사람을 보면 소나무에선 솔 냄새가 나고 느릅나무에선 구린내가 나고 계피나무에선 맵싸한 향기가 나듯이 단박에 그 사람의 냄새를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아직 이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언행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대략 짐작할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그리고 그 짐작이 잘 틀리지 않음에도 내 짐작이 무조건 맞다는 선입견을 가지지 않으려 노력 중이다.

윤보 목수는 웃어도 슬펐지요. 울어도 태평스럽고요.

아무에게도 속터놓고 말하지 못하고 감정표현에 익숙지 않은, 그만 세월을 먹어버린 남자. 그는 웃어도 슬프고 울어도 태평스러운 듯 술잔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없이 오랫동안 자리에 앉아있었다.

말을 했던 것도 아니었고 생각에 헤매고 있었던 것으로 착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무심결로 혼자서 실컷 지껄이다가 깨어나 본 적이 있는가. 술 한 잔을 마시다 혼자서 그렇게 말하다보면 말없이 들어줄 상대가 있음에 감사해하기도 하고 들어줄 사람이 없음에 가슴 깊은 곳에서 한숨을 내쉬기도 한다.

회한 없는 세월이 어디 있을 것이며 세월과 더불어 가중되는 운명의 무게를 피할 자 그 누구이겠는가.

내 인생에 벌어지는 모든 일에 스스로 책임을 지는 사람이 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젊은 날 혈기에 저지른 모든 잘못과 실수는 연기처럼 사라지지 않고 한줌의 재가 되어 가슴 깊은 곳에 달라붙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내가 저지른 과오를 인정하고 그 잘못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 내 스스로 그리고 나때문에 상처받은 이의 눈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릴 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 운명의 무게를 마음속에 짊어지고 살아갈 뿐 그 똑바로 쳐다보거나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고국을 떠나 타국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용정촌 사람들의 모습은 나에게 미국에서 삶의 터전을 잡으려 고군분투했던 과거의 기억을 환기시켰다. 그리고 그들 나름의 슬픔과 회한을 술잔을 마주하며 독백으로 풀어낸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 나의 독백도 이 글을 통해 풀어보았다. 내 독백은 진실에 얼마나 근접해있는가. 세월의 무게 속에서 풀어날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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