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rram's Life
풀 - 김수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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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 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시인 김수영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슬픔과 동질감이 함께 밀려온다. 우리 사회 지식인의 허위의식을 비판하고 비겁한 자신을 비판하는 그를 보면 우리나라 근대사의 어두운 면이 그의 눈빛에 투영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의용군에 징집되었다.
탈출하여 집에 돌아왔을때 의용군이었다는 이유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수용소내 좌우간 벌어진 살육전 속에 이데올로기의 무상함과 인간 허위의식의 극치를 경험하였다.
지옥과 같은 수용소에서 겨우 석방되어 집에 돌아오니 사랑하던 부인은 선배와 동거하며 그에게 돌아오길 거부한다.
그는 이렇게 가슴 속 깊이 패인 상흔에 또다른 상처를 받으며 젊은 날을 보냈다. 타락한 현실에 참여를 거부하며 끊임없는 자기고백과 반성으로 시와 문학을 통해 자신만의 메세지를 전달했다.
그의 마지막 시였던 '풀'을 읽으면서 나는 억새풀같은 생명력을 지니면서 그 생명력때문에 억압받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사람들과 얽혀 살아가면서 사람의 본성에 할퀴고 상처받는 이를 생각한다. 눈에 확연히 보이는, 그리고 보이지 않는 차별에 점점 무뎌지는 마음들을 생각한다. 우리 삶 속 풀이 되어 바람을 대하는 자세를 생각한다.
우리는 출발점이 각각 다른 삶 속에서 바람맞아 넘어지고 울며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일어서려다 다시 바람을 맞고 쓰러진다.
절망에 눈물을 흘려보낸다.
하지만 억새풀처럼 다시 일어선다.
또다른 바람이 불어오면 알아서 눕는 법도 터득한다.
슬퍼도 울음을 삼키고 아파도 아프지 않는 척하는 법을 배운다.
조그만 행복에 감사해하며
이것이 다 세상사는 요령이라며
자조섞은 웃음으로 다시 바람 맞을 준비를 한다.
다들 이렇게 하루하루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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