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rram's Life
[독후감] 토지 제11권 - 박경리 본문
이제 토지라는 장편소설의 절반에 다다랐다. 거의 반환점을 돈 것이다. 11권은 계명회 사건으로 감옥에 갇힌 김길상을 두고 최서희와 환국, 윤국이 가족으로서 겪는 안타까움을 이야기한다. 상현과 이루지 못한 사랑에 자포자기한 명희의 어두운 결혼생활도 그려진다. 최참판댁 서희의 집사일을 하는 연학이라는 새로운 인물도 등장하는데 송관수와 정석과 함께 앞으로 평사리와 만주 사이를 잇는 독립운동을 이끌어가는 듯한 암시를 준다.
이 책에서 충격으로 다가온 사건은 환과 기화의 죽음이었다. 환의 죽음이 난데없이 갑작스러운 것이었다면 기화의 죽음은 안타까움 그 자체였다. 복동네를 자살로 몰아버린 봉기의 악담. 그리고 마을사람들에게 공개사과와 돌팔매질을 맞는 봉기를 보며 두가지 생각이 들었다. 다른이를 배려치 않고 입을 함부려 놀려 받게 되는 벌은 정당해보였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 분위기에 휩쓸려 자신의 과오는 생각치 않고 한 사람을 희생양 삼아 돌을 던지는 군중심리에 공포감을 물밀듯 다가왔다.
품성이 자유로운 강선혜를 보며 내 과거의 모습과 그녀와의 공통점을 찾아보기도 했다. 나는 보수적이면서도 자유분방한 사내였나. 아니면 강선혜같은 사람을 손가락질하며 내 욕망을 숨기는 비겁한 사람이었나. 1부와 2부에 비해 3부에서는 좀더 다양한 인물을 데리고 나오며 각각의 성격과 심리를 묘사하는 작가의 필력이 대단하다고 느낀다. 인간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고찰에서 오는 필력인 것인가 아니면 끝없는 자기성찰의 고뇌에서 나오는 필력인 것일까.
도덕의 굴레를 썼다 하여 인간 본연의 선량함도 배제해야 하는 것은 비겁한 자의 소행이 아니고 무엇인가.
도덕은 무엇인가. 국어표준 대사전에 따르면 "사회의 구성원들이 양심, 사회적 여론, 관습 따위에 비추어 스스로 마땅히 지켜야 할 행동 준칙이나 규범의 총체. 외적 강제력을 갖는 법률과 달리 각자의 내면적 원리로서 작용하며, 또 종교와 달리 초월자와의 관계가 아닌 인간 상호 관계를 규정한다"고 나온다. 결국 도덕이라는 것은 당시 사회적 상황에 따라 규정된 인간관계 또는 관습를 유지하기 위해 다른 이의 시선을 신경써야하는 것을 뜻한다. 그 규정된 인간관계와 관습은 누가 정하는 것인가. 기존의 권력자와 기득권층이 규정해버린 관습이 도덕의 굴레가 되어 사람들 행동을 통제한다면 그것이 인간 본연의 선량함과 인간으로써 기본권리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인가. 그 도덕의 굴레를 핑계삼아 기득권층의 이익을 대변하고 힘없는 자들의 외침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비겁한 자의 소행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세월도 많이 흘렀지만 세월보다 더 빠르게 더 많이 변한 것이 인사人事로구나.
세월이 흘러 시대가 변하지만 세월보다 더 빠르게, 더 많이 변하는 것은 사람의 일이다. 느닷없이 복권당첨과 같은 행운으로 재물을 얻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인고의 노력으로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크게 변화시키기도 한다. 갑작스런 사고를 당하여 불구의 몸이 되거나 알거지가 되기도 하고 죽음을 맞이해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도 한다. 그 수많은 인사가 세월도 더 빠르게 흘러가는 것이다. 나는 이 세월동안 어떻게 변한 것인가. 내 지인들은 이 세월동안 어떻게 변했을까. 오래전 친구들이 문득 생각나는 순간이다.
조금 전까지 지난 세월은 자신과 아무런 인연이 없고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조차 낯선 나그네처럼 지나갈 것이란 생각을 했었는데, 마치 손바닥을 뒤집듯이 세월은 살아서 몸을 일으키고 그 수많은 죽음들이 선명한 모습을 드러내어 용이에게 육박해오는 것을 느낀다.
내 삶에 대해 초연해지면 지나가버린 세월이 나를 더이상 붙들지 않고 내 삶의 마지막 순간은 일상의 한켠처럼 지나가버릴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와 얽힌 수많은 사람들과의 기억은 지나간 세월을 생생하게 상기시켜며 어두운 상처와 과오들이 선명한 모습을 드러내어 나를 향해 다시 육박해온다.
사람마다 집집마다 알고 보믄 사연이야 기맥힌 것 아니겄나.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 (Leo Tolsoty, Anna Karenina, 1878)에서는 이런 문구가 나온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All happy families are alike, but every unhappy family is unhappy in its own way.)" 행복은 단순한 곳에서 오지만 불행은 각각 사연이 있는 법이며 알고 보면 그 사연은 기막히도록 안타까운 법이다. 그러니 다른 이의 불행을 쉽게 말하지 말고 충고하지 말고 그저 듣고 눈 마주치고 공감해주는 것이 최고일런지 모른다.
이제는 나이가 들었고 가정을 가졌으며 남을 가르치는 처지, 세상물정을 환하게 알게 되어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뚜렷하게 의식하고 있는 석이지만 조준구에 대한 원한만은 극복할 수 없는가.
나역시 이제 나이가 들었고 가정을 가졌으며 세상물정 다 안다고 할 수 없지만 내가 가야할 길을 의식하고 있다. 누구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원한 품는 것을 싫어했고 누군가에게 원한산 일은 한 기억도 없다. 하지만 과거에 받았던 마음의 상처와 그 상처를 준 이에 대한 원망을 극복하였는지 자문해본다. 나는 극복하였는가.. 극복하였는가.. 자신있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곧이듣건 곧이듣지 않건 사람이란 항상 남의 일에 대해선 무책임하게 마련이다.
당사자가 아닌 제삼자의 입장에서 그 당사자의 일에 판단을 내릴 수 있을 정도로 얼만큼 이해할 것이며 그것으로 파생되는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가. 내가 가장 혐오하는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당사자가 감당해야 할 고통은 전혀 생각지도 않으면서 함부로 판단하고 결론을 내려 다른 이들을 선동하는 인간들이다. 합리적인 의심 없이 주어진 정보를 주체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선동에 휘둘리는 인간들을 보면 연민의 정을 느끼다가도 화가 나기도 한다. 무책임한 유튜버들, 트렌디한 여론에만 쫓아가는 SNS 이용자들, 진실에 대한 고민없이 대다수 논리에 따라 다른 이들이 어떻게 볼 것인지, 그리고 그것에 따라 자신의 이득이 최대한이 되는 방향으로 자신의 입장을 취하는 인간들이여... 그것이 사람의 자연스런 본능일지도 모르지만, 나역시 그 부류와 다를 바 없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한번쯤 나자신에게 돌을 던지며 자기 비판을 해봐야 하는 것 아닐까.
견딜 수 없는 슬픔이 치민다. 산다는 것이 통곡인 것만 같다.
아주 가끔씩 견딜 수 없는 슬픔이 치밀어오른다. 지나간 과거를 아직도 털어내지 못하고 점점 괴물로 변해가는 내 자신이 미워진다. 이런 마음가짐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는 것에 가슴이 아프다. 살기 위해 내가 원하지 않는 내가 되어버린 사실에 흐느낀다.
강물이 희번득인다. 밤에도 쉬지 않고 흐르는 강, 세월의 눈금도 없이 흘러가고 있다. 오만하고 냉정한 젊은 여자같이 강물은 혼자 흐르고 있다.
오만하고 냉정한 젊은 여자처럼 강물은 밝은 달 아래 희번득거리며 유유히 흐르고 있다. 세월의 냉정함과 현실의 오만함 사이에서 잃어버린 내자신을 찾아 허우적허우적 더듬어본다.
물질적인 허영이라 할 수는 없지만 의식적인 허영은 상당히 강한 편이었다.
의식적인 허영을 허락하는 습관을 고치려 노력했다. 타고난 천성인 것인지, 아니면 부모세대로부터 묻어온 습관인지는 모르겠지만 의식적으로 인지하고 이 고치려 노력중이다. 적어도 인지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끼지만 몸에 배인 습관을 고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진실과 허식에서 온 차이점
내 자신을 진실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 허영과 허위의식에 치장된 나를 벗겨내는 행위. 어쩌면 내가 각 문장에 대한 감상문을 쓰는 행위 그 자체가 진실과 허식에서 온 차이점을 인지하는 과정일까.
너거들 식자가 물 위에 뜬 기름이 돼서는 안 되겄다, 그라고 너거들이 무식쟁이 농부, 노동꾼들한테 멋을 주고 있다, 가리키고 있다는 생각부터 싹 도리내야 한다. 서로 주고 받으믄서 운동을 하든 투쟁을 하든, 너거들만 주고 있는 기이 앙이다.
학생운동이든, 사회운동이든, 운동을 이끄는 소수의 사상가들이 항상 다수의 군중을 가르치려 하는 목소리와 몸짓은 나에게는 항상 거북하게 다가왔다. 저들의 목소리와 몸짓은 순수한가? 그렇다면 그들의 목소리와 몸짓을 듣고 이런 질문을 하는 나는 순수한 것인가? 수없는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지식인들이 물 위에 뜬 기름이 되어버리면 지식충知識蟲이 되고만다는 이야기를 누군가에 들었던 기억이 난다.
미련한 위정자는 백성을 굶기지만 간교한 위정자는 굶어 안 죽을만치 백성을 믹이는 기라.
우리는 왜 정치를 하는 것일까? 사람답게 살고자 내 주장을 펼치기 위해서? 글쎄, 그것을 아주 이상적인 대답이지만 현실적인 대답은 아닌 듯 싶다. 민주주의과 자본주의가 손을 잡으면 정치를 하는 행위는 우리 배를 채우기 위해 하는 행위와 일맥상통할 수 밖에 없다. 자본주의 자유 경쟁 아래 내 배도 채워달라고 주장하는 것이 정치가 되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자유민주주의는 간교한 위정자를 키워내기 위한 시스템이 아닐런지? 물론 적어도 그것은 미련한 위정자보다는 나을테지만 말이다.
농민들은 변화를 싫어하고 또 농민들은 확실한 것을 찾는다.
하늘과 땅의 이치를 믿고 순리대로 살아가는 농민들은 변화를 싫어하고 확실한 것을 찾는다. 그 보수적인 마음을 잡으면 독재자도 영도한 지도자가 되는 것이며 국민의 영웅이 되는 것이다. 자본에 찌든 현대 민중은 어떨까? 그들 역시 변화를 싫어하고 확실한 것을 찾을까? 아마도 현대의 중산층은 토지에서 언급되는 농민의 속성과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그 중산층이 무너지면 변화는 회피가 아닌 욕구가 되고 확실해진 절망보다는 불확실한 희망을 찾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자신은 무엇을 할 것이며, 또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되는데, 미진한 마음은 그칠 줄 모르게 내부 깊은 곳에 항상 도사리고 있는가. 빗방울 소리를 듣는 머릿속엔 안개가 자욱한 것 같고, 심장 복판을 타고내리는 뜨거운 것.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과 원망은 비슷한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누군가를 향해 내자신을 무엇을 할 것이며, 또 아무 일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되는데, 그 마음은 내 가슴 깊은 곳에 항상 도사리고 있다. 내 머릿 속 자욱한 안개 속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이 기분. 이따금 내 심장을 파고드는 찌릿한 기억들. 이 모든 것은 그것이 그리움이건, 원망이건,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빗방울은 어느덧 조용조용히 내리는 빗소리로 변해 있었다.
잠을 자다 문득 깨었다. 빗방울이 세차게 지붕을 때리는 소리에 깼나보다. 잠이 덜깬, 몽롱한 상태에서 손과 발을 꼼지락거리며 순간의 나곤함을 즐겨본다. 갑자기 어릴때 생각이 난다. 그때도 깊은 잠에서 깨면 어두컴컴한 천장을 보며 손과 발을 꼼지락거리곤 했다. 아무 생각없이 내일은 무슨 일이 있을까 하는 기대감과 설레임 속에서 했던 움직임이다. 나이가 먹은 이의 나곤함과 어릴적 철부지의 기대감, 설레임이 대비되는 꼼지락이다. 마치 세차게 내리던 빗방울이 조용조용히 내리는 빗소리가 되버린 것처럼...
그래도 그러는 거 앙이다. 망해서 고향 돌아온 사람은 우리가 청해야겄지마는 잘돼가지고 고향 온 사람은 그쪽에서 찾아야제.
망해서 고향 떠난 사람이 잘 되어서 돌아간다면 어떻게 해야하나. 내가 일일히 찾아다니며 나 잘 되서 돌아왔소 해야 하나? 나 망했때 비웃던 사람들 하나하나 찾아서 나 이젠 잘 되었으니 무시하지 마소~ 하고 뽐내야 하나? 내 낯짝이 그렇게까지 두껍지는 않을 것 같다. 한국에 들어갈 때마다 지인과 연락을 회피하고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에 충실하는데는 이와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들판에는 엄폐물이 없고 산속은 공격목표하고 너무나 멀다.
도시는 동학의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환이는 이렇게 표현한다. 갑자기 일제시대 독립운동과 연계된 동학운동이 한국전쟁 직후 빨치산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대한민국에서 빨갱이이라는 말은 아직도 듣기 거북한 말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빨치산을 동학운동과 연계하여 언급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기존 지배세력에 대항하여 변화의 욕구를 분출한 것에도 서로 상통하는 면이 없지 않다. 다만 차이점은 동학은 민족주의 관점에서 일제에 대항한 것이었다면 빨치산은 민족끼리 벌어진 계급투쟁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민중은 지도자가 키우는 게 아니라 생각합니다. 스스로 크는 거지요.
길상이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일어난 자중지란의 암울한 상황속에서도 희망을 가지는 이유다. 민중은 정말 스스로 크는 것일까? 내가 아는 민중은 현실에 대한 자각을 하면서 변화를 추구하는 그룹과 현실에 대한 한계를 인정하고 정해진 게임의 법칙에서 성공을 추구하는 그룹으로 나뉘어진다. 그 속에서 분열하고 서로 다른 그룹끼리 투쟁하며 파멸의 길을 걷기도 한다. 내가 바라보는 민중은 스스로 커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존하는 법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너무도 억측일까?
자기 자신의 죽음과 모든 사람의 운명으로 확대되어간 허무의 깊이 모를 심연이었다.
내 자신이 죽어 없어진들 세상이 변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의 운명이 변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세상에 이름모를 풀잎처럼 존재하는 생명체들의 일부일 뿐이다. 내 자신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너무 강한 나머지 세상이 끝날 것처럼 자신의 죽음과 처절하게 투쟁하는 이들은 인간 본성의 이기심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일뿐일까? 나역시도 체념하지 못하고 삶에 집착할 것인가. 죽음을 생각해보았지만 죽음의 벼랑을 경험해보지못한 이가 가진 한계인 것인가?
갑자기 검은 바람이 발끝에서 전신을 덮어씌우는 것 같은 느낌이 엄습해온다.
가끔씩 불길한 상상을 해본다. 내 부모님이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나는 어떤 기분이 들까? 한때 와닿지 않을 상상속의 사건일뿐이라고 치부하던 일이 점점 발끝에서 내 몸을 감싸 올라오는 것 같다. 전화를 받고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가서 마지막 작별인사를 할 수 있다고 다행일 것이다. 마지막 인사를 못드린다면 안치-입관-발인의 3일상을 치르며 그분들의 흔적이 있는 지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매장을 하는 순간 마지막 인사를 드리는 나자신을 생각해본다. 그때는 어떤 기분이 들 것인가. 떠나버린 부모님에 대한 아쉬움과 남겨진 이들의 서러움을 담아 실컷 눈물을 쏟아낼 것인가. 부모님과 지나간 시간을 추억하며 충분치 못했던 효심에 후회하고 남겨진 내 자신에 대한 연민으로 말없이 외로이 서있을 것인가.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어두운 바람이 발끝에서 내 온몸으로 휘감아 올라오는 것 같다.
서로가 서로를 회피하는 경향, 무관심해지려는 경향, ...(중략)...
유학간 학생들은 동포이면서 이민족만큼이나 두터운 의식의 벽으로 갈라져 있었다. 노동력으로 고학을 하는 학생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그들 스스로의 성곽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미국에 공부하러온 후 처음 1~2년 정도는 한국학생과 종종 어울리기도 했다. 적극적으로 한국학생들을 찾아다니는 편은 아니었지만 나에게 다가오는 한국학생들을 마다 하지 않았다. 직장생활을 시작한 후에도 종종 한국인들을 마주치곤 했다. 학생때는 그나마 유학생끼리 서로 어울리던 경향이 직장을 다니기 시작하면 서로가 서로를 회피하고, 무관심해지려는 경향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아니면 이것은 한국인이 많지않은 미국회사를 다녔고, 아직도 다니고 있는, 나만의 경험인지도 모르겠다. 미국에서 비한국회사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한국인들은 서로가 동포이지만 이민족만큼 두터운 의식의 벽으로 갈라져 있다. 각각 나름의 성곽을 쌓아올려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며 살고 있다. 그것이 꼭 나쁘다고 할 수도 없지만 좋다고도 말하지는 못하겠다.
인간의 목적, 어떤 형태로는 목적에서 초월하는 것은 성인의 길이요, 사람은 각기 나름대로 목적을 가지는 법인데, 물론 최선은 목적을 달성하는 일이겠지. 차선은 목적에 비하여 자신의 능력으론 감당할 수 없을 때 깨끗이 포기하는 일인데, 능력이 못 미쳐 탈락한 사람들은 대개 반드시 그 목적 자체를 경멸한다는 게야.
나의 목적은 무엇이었던가. 내가 살아왔던 길을 더듬어본다. 어린 시절, 나는 남들이 인정하는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렇게 공부를 나름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그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아마도 내 능력이 감당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던 듯 싶다. 대학 시절 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원하던 곳에 있지 못한 데 대한 자기체념일 수도, 현실에 대한 타협이기도 했다. 하지만 패배의식에 빠져 목적 자체를 경멸하지는 않았었다. 대학원을 갔고 몸을 감싸오는 현실에 분노를 느꼈을때도 나는 목적 자체를 경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목적은 확고해지고 구체적으로 변해갔다. 유학생활을 한 후 직장에 취직하고 결혼을 하며 안정된 생활을 가지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현실에 쫓겨 보이지 않던 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난 기억의 파편에서 그 이면에 감추어진 진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차츰 내 자신이 가졌던 목적의 이유에 분노하기 시작했고 타인들이 바라보는 그 목적의 이면을 경멸하기 시작했다.
냉랭한 눈빛이다. 조롱의 빛도 지나간다. 그러나 그런 눈에 익숙해져 있는 명희는 태연하게 커피를 마신다.
냉랭한 눈빛과 조롱의 시선을 느꼈다. 그 순간은 참고 지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눈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너무나도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런 눈에 변해가는 내 자신을 느끼는 것 역시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래서 나는 말없이 떠났다. '이제는 나자신를 위해 살고 싶습니다'라는 메세지를 남겨놓고서...
마음 바닥에 기차 바퀴가 갈고 지나간 것처럼 쓰라림이 지나간다.
지인이 생각없이 조그만 돌맹이를 말 속에 담아 던지만 그것은 내 마음 깊은 곳에 커다란 파동을 남긴다. 고요한 마음 바닥에 자동차 바퀴가 치고 지나가면서 튀어나온 진흙탕물이 내 마음 속을 더럽힌다. 더러워, 이렇게 흔들리는 내자신이 더러워서 미쳐버리겠어!! 내 마음 속 목소리가 마치 결벽증환자처럼 히스테리컬한 목소리로 메아리친다. 마치 마음 바닥에 기차 바퀴가 갈고 지나간 것처럼 쓰라림이 지나가는 것처럼 말이다.
명희는 깨어진 자기 자신을 주워모아 그릇에 담아버린 평소의 작정된 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내 자신이 하루가 다르게 무너져가는 것을 느꼈다. 하루하루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살아가는 것은 마치 깨어진 내 자신을 주워모아 그릇에 담아놓은 것만 같다. 마음속은 이미 산산조각이 나버렸는데 아무렇지 않은 듯 평상시처럼 행동하는 내 표정과 몸짓이 갑자기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나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걸까? 끝없는 심연 속에 빠져들어가는 내 마음을 따라 나는 죽은 자처럼 표정없는 얼굴을 가진 존재가 되고 말았다.
메마르고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나올 것 같지 않았던 황폐했던 마음 어느 구석에 눈물방울이 남아 있었더란 말인가.
그렇게 무표정한 시체의 얼굴에서는 찔러도 피 한방울 나올 것 같지 않는데 조그만 돌맹이 하나 심은 말 한마디에 그만 눈물이 터져 나올때가 있었다. 눈빛 속에는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나오는데 눈물방울은 안구밖으로 터져나오지는 못한다. 그 누더기 같은 자존심도 자존심이라고 아직도 눈물방울이 터져나오는 것을 틀어막고 있는 것이다.
까닭 없이 멍해지는데 새로운 분노가 치미는 것이었다. 선혜는 자신을 나쁜 인간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남을 해친 일도 없다고 생각했다. 남한테 해 될 것도 없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좀 했을 뿐인데 어째서 지탄을 받아야 하며 소외를 당해야 하는가 싶었다.
자유로운 영혼과 숨김없는 모습은 기존의 틀 안에서 성공을 갈구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된다. 잰 왜 저래? 넌 왜 그러니? 자신만의 잣대를 들이대며 상대의 솔직함에 질투아닌 비난과 비판을 쏟아붓는 것이다. 그런 공격을 당하면 까닭없이 멍해지면서 갑작스레 분노가 치민다.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닌데 당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 해서 왜 이런 공격을 받아야 하나? 니가 뭔데? 라고 하다가 결국 싸가지 없는 놈으로 낙인 찍히고 만다.
고통은 자연이지 인위적인 것은 아니다.
왜 이리도 이 말이 기억 속에 박혔을까? 고통은 자연이지 인위적인 것은 아니다. 육체적 고통을 꾀병이라 치부할 수 있겠으나 그 진실된 고통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마음 속 고통은 표현여부에 관계없이 자연스럽게 내 마음 속에 자리잡는 것이다.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운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어야 한다. 인위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랑이나 연애니 그런 것 체념해버리면 어차피 생활이란 공범자로 시작되는 거 아니겠니?
'사랑을 믿나?'라는 질문에 나는 '글쎄요...'라는 말로 얼버무린다. 내가 사랑을 진정 믿었나? 연애를 많이 해보지는 못했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육체를 탐닉하고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사랑을 체념해버리면 어차피 생활과 욕망이라는 공범자로 시작되는 것 아닌가? 어쩌면 나는 진정한 사랑을 해보지 못한 채 젊은 시간을 보내버렸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안 하는 것은 쉽고 하는 것이 어려워. 사내는 어려운 길을 택해야 할 것이다.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안하고 포기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실천하는 삶은 어렵다. 나라는 인간이 의미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실천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옳다. 그 선택이 아직도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
과거는 무의미한 것이며 없는 것이며 죽은 것이다. 현재만이 살아 있는 것, 미래만이 희망이다. 아이들은 현재요, 미래다.
미국생활을 막 시작할 당시 과거는 무의미하고 존재하지 않으며 과거의 나는 이미 죽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오직 현재만이 나에게 존재했으며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가족을 꾸리고 아이들이 생긴 지금, 나에게는 아이들이 현재이자 미래이다. 활짝 웃음을 짓는 아이들 얼굴을 보면 미래, 희망, 행복이란 단어가 새삼 가깝게 느껴지곤 한다.
나는 옛날 일을 잊어야겠지만 자네는 더러 옛일을 생각하게.
서희가 아편에 찌든 기화(봉순이)를 보며 하는 말이다. 갑자기 과거의 회한과 고통을 잊으려는 자와 현재 무너져내리는 자가 대면하는 모습이 머리속에 떠오른다. 그때 이 말을 해주었다면 어땠을까? 덕담이 되었을까 아니만 조롱이 되었을까? 까닭없이 분노를 표출하던 지인의 모습에 그가 완전히 무너져내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뒤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내가 하는 무슨 말이든 그에게 조롱과 조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그 분노의 표시로 나에게 상처를 안겨주려 달려들던 그의 모습이 너무도 불쌍해보였기 때문이다.
애정은 권위를 무너뜨린다.
권위라는 말과 거리를 둔지 오래되었다. 그 권위가 싫어서 한국을 떠났으니 거리를 두었던 내자신이 이해될만 하다. 어쩌면 내 자신에 대한 애정이 권위와 거리를 두게 한 원인인지도 모른다. 애정은 권위를 무너뜨릴 뿐만 아니라 권위로부터 도망치게 만든다.
겨울이란 계절은 좋지요. 그냥 쓸쓸한 게 아닙니다. 뼛골에 스며드는 그런 감정의 계절이니까요. 여행하기엔 더없이 좋은 계절이지요.
겨울이란 계절을 좋아했다. 추운 바람이 스며들어 온몸에 스며들면 으스스한 기분에 옷깃을 여미고 재킷을 꼭 껴입었다. 겨울코트나 재킷은 멋부리는데 제격이었다. 누군가처럼 쓸쓸한 마음이 뼛골에 스며드는 외로움때문보다는 멋부리는 허영감을 부추기는 추위때문에 겨울을 좋아했나보다. 그때는 그렇게 외로움과 쓸쓸함의 진정한 의미를 모른체 허영심과 쓸데없는 감상에 취해 살았다.
도망은 상실과 망각에서 오는 일종의 충격일까.
글을 읽다 이 문장을 마주하고 한동안 다음 문장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도망은 상실과 망각에서 오는 일종의 충격. 나도 내가 살던 곳을 그렇게 도망쳐나왔을까. 내 존재에 대한 상실감과 내가 처한 현실에 등을 돌리고자하는 망각에서 오는 일종의 충격이었나.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회오리에 나의 마음이 사로잡히는 것 같아 순간 괴로움을 느꼈다.
도대체 진실이란 무엇일까? 진실을 위해 진실을 희생해야 하는 것은 모순이다. 하물며 평정을 위해 진실을 희생하는 것은 모순 이상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람의 도리를 지켜야 한다고 한다. 사람의 도리는 무엇이며...... 약자를 희생시켜온 것이 대부분의 도리가 아니었더란 말인가? 사내답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 약자를 보호하기보다 약자 위에 군림하는 것을 두고 사내답다 해오지 않았던가?
진실은 그 누구에게 쉽게 이야기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깊이 담아두어야 하는 판도라의 상자같은 것일까? 그 상자를 열어놓고 밖으로 크게 이야기해버리면 내 자신과 주변사람 관계를 어지럽히기 때문에 평정을 위해 진실을 상자속에 꼭꼭 묻어두어야 하는가? 그것이 과연 사람의 도리를 지키고 예의를 지키는 것인가? 그렇게 약자를 처절히 희생시키며 지키는 도리와 예의는 무엇이더냐? 결국 강자의 논리에 따라 순리대로 사는 것이 도리에 맞는 삶이더냐? 마음 속 대나숲에서 목청놓아 외쳐본다.
영원히 떠날 것이면 한 번쯤, 의지나 목표나 일상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자신을 위한 자유를 누릴 수는 없었더란 말인가.
내자신의 보금자리를 영원히 떠날 생각이었다면 한번쯤 내 자신을 위한 목소리를 목청껏 낼 수도 있었을텐데 도리와 예의라는 허울에 발목이 잡혀 그러지도 못했다.
부끄러운 고백으로 그쳐버린 일을 석이는 목구멍에서 타는 술기처럼 되씹어본다.
나의 마음을 드러내는 고백은 언제나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서 용기를 필요로 하곤하고 술기를 빌어 실행을 하곤 한다. 독한 소주를 마시며 자신의 부끄러운 고백을 회상하는 석이. 그의 마음을 너무도 잘 표현한 문장인 것 같아 이렇게 필사해본다.
상가의 기둥 빛이 길바닥에 드러누워 말할 수 없는 외로움을 몰고 온다.
어두워진 서울 도심을 나는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네온싸인의 화려한 빛이 반짝거리는 사이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길을 따라 무표정한 모습으로 빠르게 지나간다. 그 인파 속에 비치는 상가의 화려한 불빛은 사람들 발자국 사이에 엉키고 엉켜 말할 수 없는 번민과 외로움을 함께 몰고 온다. 나는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 갈 곳 잃은 강아지 마냥 마음속으로 낑낑거리며 땅바닥만 보며 걸어가는데 상가의 화려한 네온싸인 빛은 길바닥에 드러누워 내 안경을 사정없이 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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