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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여행] 샌안토니오 미션 답사기 (San Antonio Mission Visit)

Barram 2020. 11. 25. 13:18

텍사스주 (Texas State)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미국 역사와 함께 텍사스 주역사를 따로 배운다. 4th grade (우리나라로 치면 초등학교 4학년)에 있는 딸아이가 이번 학기에 샌안토니오 부근에 위치한 가톨릭 교회 유적지에 대해서 배웠는데 그 장소를 직접 가보고 싶다고 와이프에게 말한 모양이다. 추수감사절 연휴를 앞두고 하루 휴가를 내어 샌안토니오를 무박 일정으로 다녀왔다. 원래 1박 2일 일정을 생각했으나 코로나 바이러스 상황이 최근 들어 악화되었고 정부에서 여행을 되도록 자제하라는 권고에 고민 끝에 결국 무박 일정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한 이후 스페인 제국은 자국의 식민지 확대를 통한 이익 증대와 원주민들을 상대로 한 가톨릭 포교를 목적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가톨릭 교회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대상 지역은 현 미국 서부 해안, 중부, 텍사스를 비롯한 중남부 지역을 포함해 브라질을 제외한 라틴아메리카 지역이었다. 샌 안토니오는 1700년대 건설된 가톨릭 교회 군락지들를 비교적 잘 보존하여 총 여섯 곳이 미국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 알라모 (The Alamo)
  • 콘셉시온 미션 (Mission Concepcion)
  • 산호세 미션 (Mission San Jose)
  • 산후안 미션 (Mission San Juan)
  • 에스파다 미션 (Mission Espada)
  • 미션 농장 (Mission Ranch)

 

교회라고 번역해서 올렸지만 정확한 표현인지 잘 몰라서 이 글에서는 일단 "미션(Mission)"이라고 칭하기로 한다. 미션은 과거 원주민들의 카톨릭 개종을 목표로 험지에서 세워진 가톨릭교회의 전진기지를 일컫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1986년 로버트 드니로와 제레미 아이언즈가 주연으로 나왔던 영화 "미션 (The Mission)"을 생각해보면 그 의미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샌안토니오 시에서는 샌 안토니 오강을 따라서 위치한 여섯 군데의 미션을 따라 자전거를 이용해 순례할 수 있는 미션 탐방 코스 (The Mission Trail)를 만들었다. 안내 프로그램과 각 미션이 어디에 위치했는지 알려준 자세한 정보를 아래 링크로 올렸다.  

npmaps.com/san-antonio-missions/

 

San Antonio Missions Maps | NPMaps.com - just free maps, period.

Need a San Antonio Missions map? Here I've collected 10 free high-resolution San Antonio Missions National Historical Park maps to view and download!

npmaps.com

가족들을 데리고 모든 미션을 방문하고자 했으니 샌안토니오 지역에 익숙지 않은 관계로 콘셉시온 미션 (Mission Concepcion)은 방문하지 못했다. 

 

샌안토니오 지역에 있는 미션들의 공통된 특징은 이들 미션이 단순한 교회건물이라기보다는 요새화 된 군락지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각 미션은 교회건물과 더불어 주거지, 농장, 목장 등을 운영하면서 원주민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고 스페인 제국의 식민교육 장소로 이용되었다. 방어요새와 같은 담벼락이 미션을 감싸고 있는 것을 보아 제국의 약탈과 식민교육에 항거하는 원주민이 당시에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프랜시스칸 (The Franciscans)이라 불리는 가톨릭교회의 계파 그룹은 1700년대 초기 이 여섯 군데의 미션을 건설함으로써 샌 안토니오라는 도시가 탄생할 수 있는 근간을 마련했다. 안내문을 보니 미국 내 비백인그룹으로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히스패닉계 사람들(Hispanic people)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희생 및 공헌을 기리면서 이 미션지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하지만 정복민에게 굴복당했던 원주민들과 굴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난을 당했던 피정복민들에게는 이 미션이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정복자와 피정복자 간 역사의 양 단면이 머릿속을 잠시 후비고 지나간다.

 

당일 치기로 다녀온 알라모, 산호세 미션, 산후안 미션, 에스파다 미션에 찍은 사진들을 중심으로 미션 답사기를 적어보고자 한다.

 

알라모 (The Alamo)

우리가 "알라모" 하면 떠오는 것은 1836년 멕시코 군대에 대항해 텍사스 독립군 전원이 끝까지 싸우다 전원 사망한 알라모 요새 전투일 것이다. 하지만 알라모는 1718년 샌안토니오 강 부근에서 "샌 안토니오 데 발레로 (San Antonio De Valero)"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미션이다. 스페인 제국 군대의 지원을 등에 업고 세워진 이 미션은 1800년 초기 멕시코가 스페인에서 독립한 뒤 멕시코 혁명군대와 스페인 충성파 군대가 번갈아가며 점유한다. 1821년 텍사스에 거주하는 미국인들과 멕시코인들이 알라모에서 스페인 충성파 군대를 몰아내고 자치독립을 선포하게 되면서 첫 번째 텍사스 공화국 (The First Republic of Texas)을 세우게 된다. 독립 초기 텍사스공화국은 멕시코인과 미국인들로 구성되었으나 점차 동부에서 이주해오는 미국인들이 증가하면서 미국인들의 영향력이 커지게 되었다. 초기 텍사스를 독립된 자치주로 인정했던 멕시코 정부가 텍사스 지역에서 점점 커져가는 미국인들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인들의 텍사스 이민을 제한하고 미국인들과의 교역에 엄청난 관세를 부과하면서 멕시코와 텍사스 공화국과의 긴장감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멕시코가 텍사스를 침공하면서 발생한 전투가 우리가 알고 있는 "알라모 요새 전투"이다.

 

 

알라모 미션의 모습 (The Alamo)

 

알라모 요새 전투 당시 대부분의 건물이 멕시코 군대에 의해 파괴되었고 미션 건물만이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멕시코 혁명 군대가 텍시스공화국에 패한 뒤 물러나면서 알라모는 오랫동안 폐허가 된 모습을 유지하다가 1876년 미션 교회건물을 제외한 대부분의 토지와 건물들이 일반인들에게 팔리게 되면서 이 지역은 상업가로 탈바꿈하게 된다.

 

 

1836년 알라모요새 모형

 

알라모 미션으로 가는 곳에는 알라모의 시대적 변천사를 알려주는 요새 모형물들이 연대순으로 있었다. 

 

알라모 요새를 방어하는데 이용되었던 4 파은드 포신 모형

 

알라모 기념관 부근에 알라모 요새에서 발견된 4 파운더 (pounder)라는 포신 모형이 전시되어있었다. 이 포는 1852년에 알라모 요새 건물터에서 발견되었는데 실제 전투에서는 운반상의 불편함으로 인해 사용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알라모 요새 복원 프로젝트를 안내하는 글

 

2020년 11월 추수감사절 주중에 방문한 알라모는 복원 프로젝트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여기저기 공사 중이라는 팻말과 더불어 출입을 통제하는 곳이 많았다. 

 

 

알라모 요새터를 관람하는 가족

 

딸아이가 학교에서 배운 것을 보기 위해 알라모 미션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했으나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출입인원에 제한이 있었다. 출입을 하기 위해서 예약을 해야 하는데 도착 당시 당일 출입 예약이 모두 만료되어 실망스럽게도 미션 건물 안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특히 딸아이가 너무나도 실망스러워했다. 결국 알라모 요새터를 돌아보는 것으로 첫 번째 미션 답사를 시작하였다. 

 

 

알라모요새를 지원하러 곤잘레스에서 건너온 32명의 희생을 기리는 비석

 

알라모 요새터에는 당시 알라모 요새 대장인 트래비스의 요청에 응답하여 곤잘레스에서 급파된 32명 용사들의 희생을 기리는 비석이 있다. 당시 32명의 용사들은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알라모에 간 것일까? 전해진 내용에 의하면 그들은 마지막 전투 전 탈출할 기회가 있었지만 요새에 남아 끝까지 싸우기로 했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죽음의 공포를 이겨낸 그들의 용기에는 마음이 숙연해진다.

 

 

일본인 지리학자 시게타카 시가 교수가 1914년 알라모에 헌정한 시.

 

알라모 요새 한 구석에는 한문으로 쓰인 비석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1914년 일본인 지리학자 시게타가 시가 교수가 알라모 요새에 헌정한 비문이다. 이 비문에는 알라모 전투를 1575년 일본에 있었던 나가시노 성 전투와 비교하면서 지은 시가 새겨져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알라모 요새 전투 당시 지원군 요청을 담당했던 메신저가 본인이 죽을 줄 알면서도 다시 알라모로 돌아와 동료들과 함께 전사한 것이 나가시노 성 전투 당시 메신저가 했던 행위가 비슷하다 하여 이를 기념하기 위해 시를 지었다는 내용이다.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 일본인의 자취가 있어서 조금 놀랐지만 당시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체결한 직후 일본과 미국의 우호관계를 생각하면 일본인 학자가 했던 그 오버액션이 조금 이해될 만했다. 

 

 

복원작업이 한창인 알라모 요새

 

여기저기 복원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어서 많은 곳을 세세히 둘러보진 못했지만 알라모 미션과 요새에 관한 역사공부와 뜻하지 않는 발견에 재밌는 시간을 보냈다.

 

알라모에서 약 1시간여를 머문 후 우리는 다음 목적지인 산호세 미션으로 향했다. 원래 콘셉시온 미션으로 갔어야 했는데 사전 준비가 부족한 탓으로 길을 잃고 잠시 헤매다 산호세 미션으로 직행하게 되었다.

(콘셉시온 미션은 2021년 6월4일 미국 텍사스 서부 자동차 여행중 방문하게 되었다. 콘센시온 미션 방문기를 찾아가기)

 

산호세 미션 (Mission San Jose)

 

산호세 미션 입구

 

산호세 미션 (MIssion San Jose)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규모가 상당히 크고 오랜 건축 구조물들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었다. 어찌 생각해보면 알라모보다도 더 볼거리가 많은 곳이었다. 기대를 전혀 안 하고 간 장소에 마치 보물을 찾은 기분이랄까? 

 

 

산호세 미션내 교회건물

 

1720년에 세워진 산호세 미션은 미대륙에 있던 미션들 중 가장 모범적인 곳으로 꼽히는 곳이다. 이 곳은 원주민 교화센터와 더불어 스페인 이주민들의 커뮤니티 센터로 적극 활용되었다고 한다. 약 300여 명의 거주민이 미션 내에 살고 있었으며 창고에는 거주민들을 1년 동안 먹일 수 있는 양식이 쌓여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이유로 코만치와 아파치 인디언 부족의 습격 대상이 되었고 방어를 위해 미션에는 성곽을 방불케 하는 돌담 벼락이 만들어졌다.

 

 

방어요새를 방불케하는 돌 담벼락

 

미션 내에서 300 명이상 거주민이 있었던 만큼 여기저기 당시 생활 흔적들을 찾을 수 있었다. 빵을 굽거나 요리를 하는데 이용되었을법한 화로들이 곳곳에 있었다. 

 

 

요리하는데 이용되어을법한 화로

 

푸른색 하늘과 솜사탕 같은 구름 아래 펼쳐진 교회건물은 잘 보존된 모습으로 오래된 세월의 흔적을 드러내며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내었다. 

 

교회건물을 가까이에서 찍은 사진

 

사진 찍기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앞으로 이 곳을 강력히 추천할 것 같다. 여기저기 기억에 남기고픈 풍경을 스마트폰 화면에 담갔다.

 

 

오래된 건물터 창가에서 본 교회건물

 

샌 안토니오에 몇 번 와봤지만 주로 알라모 요새, 리버워크, 씨월드 정도를 가보았을 뿐, 이러한 장소가 숨어있는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청명한 하늘을 배경으로 찍은 건물들 -1-

 

300여 년 전 건물에서 바라본 하늘의 모습이 이러하였을까? 당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당시 이 곳에 있었던 사람들의 흔적과 기분을 바람이 스쳐가듯 잠시나마 느껴보려 한다. 그때 당신들은 행복하셨습니까? 아니 살아서 이렇게 숨 쉬고 있다는 것에 행복하셨습니까? 아니면 그들의 말마따나 구원받아서 행복하셨습니까? 쓸데없는 질문이 많아진다.

 

 

청명한 하늘을 배경으로 찍은 건물들 -2-

 

누렇게 또는 거무룩하게 떠있는 건물 벽면은 이 곳에서 본인의 의지였던, 비자발적이었든, 살아간 사람들의 마음이 여기저기 먹물처럼 번져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건물안 통로

 

아치형으로 그려진 건물 안 통로에는 분주한 바깥을 관망하는 정복자들의 여유로운 걸음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청명한 하늘을 배경으로 찍은 건물들 -3-

 

어찌 보면 내가 이 곳 건물에서 바라본 좁디좁은 하늘은 그들이 보았던 하늘과 같았을 것인데.. 그들이 살았던 세상과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돌아가는 것은 그다지 크게 변하지 않았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교회 내부정경 -1-

 

교회 건물 내부로 들어가면 생각보다 높은 천장과 큰 면적 그리고 고요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경건한 마음을 불러온다. 아들 녀석은 음악과 분위기가 무섭다며 나가자고 칭얼댄다. 이놈~ 너도 전생에 지은 죄가 많은 가보구나!

 

 

교회 내부 -2-

 

 

 

교회 출입구

 

교회 출입구로 나오면 아름다운 조각과 조형물들이 정문을 감싸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래된 세월의 풍파 속에서 큰 손상 없이 300년간 잘 보존되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교회앞의 묘지

 

교회건물 바로 앞에는 교회의 성직자를 기념하는 묘비가 있다. 옛 스페인어로 적혀있어 자세한 내용은 읽어보지 못했다. 신기하게도 이를 설명하는 안내표지판조차 부근에서 보이지 않는다.

 

 

교회건물바깥 방앗간으로 가는 길

 

교회 건물에서 멀지 않은 곳 돌담 벼락에 출입문이 있다. 그곳을 지나면 당시 관개수로를 이용해 밀가루를 만들던 방앗간이 있다 (Mill and Acequia). 이 곳은 당시 교화된 인디언 원주민들의 주식을 밀가루로 된 빵으로 바꾸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소이다. 텍사스 지역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방앗간으로 1794년 처음 지어졌으며 1930년대 복원되었다고 한다.

이 곳을 방문하며 갑자기 든 생각은... "하나님. 주식 교화 품목에 쌀밥과 김치를 빼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멘."

 

물론 웃자고 쓴 글이다. 제러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의 "총,균,쇠 (Guns, Germs, and Steels)"에 의하면 당시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수렵채집에 의한 식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교화 방편의 일부로 농경생활을 정착시키고 이에 따른 식생활 변화를 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그의 책 "사피엔스 (Sapiens: A Brief History of Humankind)"에서 수렵채집에서 농경생활으로의 전환을 역사상 최대의 사기(History’s Biggest Fraud)'라고 말했지만 당시 인디언들에게는 이런 '사기'를 당할 여유마져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농경생활은 대자연의 일부로서 자유럽게 살아가던 영혼을 빼앗아가버리고 그들의 육체를 착취하는 시대의 서막이었는지도 모른다.

 

방앗간 설명서

 

교회 건물 부근에는 당시 사용되었던 우물터가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었다.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건져 올리는 엄마와 그 옆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아이들의 즐거운 웃음소리와 땀에 젖은 어머니의 미소가 우물가 주변을 환하게 밝혀주는 듯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환청이려니 하는데 이런~ 이것은 내 아이들의 웃음소리다. 우물가에서 노는 아이들의 소리는 3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행복한 미소를 그려준다.

 

 

우물가의 풍경

 

뜻밖의 장소에서 보물을 찾은 듯한 놀라움을 안겨준 산호세 미션을 뒤로하고 다름 목적지인 산 후안 미션으로 출발한다. 산 후안 미션은 산 호세 미션에서 자동차로 약 7~8 분 거리에 있었다.

 

산 후안 미션 (Mission San Juan)

 

산 후안 미션은 광활한 대지에서 과수원, 목장, 그리고 농경지를 운영하며 인근 미션들에게 필요한 양식과 신선한 농작물을 제공하였다. 원래 텍사스주 동쪽 지역에서 산 호세 데 로스 나조니스(San Jose de los Nazonis)라는 이름으로 세워졌던 미션이었지만 1731년 이 곳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산 후안 미션 간판

광활한 개활지에 한 때 3,500마리가 넘는 양들을 사육했다고 한다. 또한 과수원에서 복숭아, 포도, 호박, 고추 등을 경작했고 농지에서는 옥수수, 콩, 고구마, 사탕수수를 재배하여 이 지역에 있는 미션들의 자립운영 및 커뮤니티 형성에 큰 기여를 했다고 한다.

 

산후안 미션 곡식 창고 건물

 

당연히 이 곳의 실질적인 노동을 제공하던 사람들은 가톨릭 교화 대상인 원주민들이었을 것이다. 원주민들의 땀이 벽돌에 스며들어 검붉게 비쳐 보이는 것일까? 그들의 흔적은 소리 없는 바람에 실려 내 몸에 부딪혀오는 것만 같다.

 

오래된 주거지 터

교회 건물 옆 담벼락에는 조그마한 출입문이 있는데 이에 대한 안내판이 하나 서있다. 이 출입문은 산후안 미션에 들어가기 위한 관문으로서 출입 허가증을 제시하지 않으면 외부인들은 산후안 미션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출입문에는 관리인 또는 위병들이 항상 출입자들과 그들이 가져온 물품을 감시했다고 한다. 농산물이 풍부한 산후안 미션에서 상업 및 교역활동이 매우 활발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당시 유럽에서의 흑사병에 대한 충격 이후 이 곳에서는 아주 까다로운 검역활동이 이루어졌다고도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여파가 항상 체감되는 요즘... 이 출입문에서의 검역은 단지 역사 속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산 후안 출입문과 검역장소

출입문을 나오면 조그만 개울가로 이어지는 몇 갈래의 오솔길들이 나온다. 오솔길 한 군데를 따라 걸음걸이를 옮기다 보니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가 마음을 상쾌하게 해 준다. 아마도 이 개울가는  산 후안 미션의 농경지와 과수원을 비옥하게 일구어준 수맥이라 생각된다. 

 

개울가에 연결되는 오솔길 갈림목에서

오솔길 산책을 마치고 출입문에 다시 들어온다. 갑자기 어디선가 위병이 튀어나와 출입 허가증을 요구할 것만 같다. 

 

산후안 미션 출입구

 

산 후안 미션을 나오는 길에는 1850년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미션 창고로 이용되던 건물이 있다. 햇빛이 내리쬐는 오후인데도 건물 안 그늘가에서 유령이 나옴직한 분위기가 풍겨 딸아이를 조금 놀려주었다. 여전히 겁 많은 딸아이에게 주먹으로 한 대 맞았다. 

 

 

에스파다 미션 (Mission Espada)

오늘의 마지막 일정은 에스파다 미션을 찾았다. 산 후안 미션에서 자동차로 약 3~4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다. 이 곳에 들어서자마자 딸아이가 나에게 문제를 낸다.

"지금까지 방문한 미션 중 가장 오래된 미션은 어디일까요?" 

"글쎄, 네가 이 곳에서 질문을 하니까 이 곳 에스파다 미션?"
"딩동댕~"

 

이 미션은 1690년에 텍사스 동부에 지어졌다가 1731년에 이 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처음 지어진 년도로 따지면 이 미션은 텍사스에서 가장 오래된 미션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에스파다 미션 간판

안내판을 보니 이 미션에서는 주로 원주민들에게 장인 기술을 가르쳤다고 한다. 목공재를 다루는 법, 벽돌 및 조각상 만드는 법, 대장장이 및 철제 농기구 수리법을 원주민들에게 가르치면서 주변 미션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제공했다. 때문에 이 곳 건축물을 자세히 보면 다른 미션에서 볼 수 없는 섬세한 건축기법을 엿볼 수 있다.

 

에스파다 미션 입구

에스파다 미션 입구를 들어가다 보면 출입구 상단에 조그마한 벽돌을 촘촘하게 아치 모양으로 만들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안내판을 보니 원주민들은 로마식 형태의 조그마한 벽돌을 직접 제작하여 이 곳 미션 건물 하나하나를 가꾸어놓았다. 

 

에스파다 입구

교회 건물로 가는 골목에 오래된 교회건물 터가 있다. 미션이 막 건설되었던 때 구 교회터에서는 커뮤니티의 모든 행사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옛 교회 터

그리고 또 다른 교회 건물이 나무 사이로 보인다. 

 

에스파다 미션 교회 건물

교회 건물 출입구 벽돌과 장식을 보면 다른 미션들과는 달리 보다 섬세한 조각과 장식을 엿볼 수 있다. 돌을 일일이 깎아서 출입구 주변을 장식한 것이 참 흥미롭다.

 

에스파다 교회 출입구 모습

이제 샌 안토니오 미션 일정이 마무리되어간다. 벌써 오후 4시, 아이들이 조금 피곤한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마지막 미션 답사 길이 조금은 아쉬워 에스파다 미션의 오래된 건물 터들을 상대로 셔터를 눌러본다.

 

에스파나 미션 오래된 건물터

 

집으로 오는 3시간여의 운전은 조금 피곤했지만 생각지도 못한 장소들의 발견과 옛사람들의 흔적에서 즐거움을 느꼈다. 딸아이 덕분에 좋은 구경 했다며 이 곳에 오길 정말 잘했다고 말했더니 딸아이는 어깨를 들썩인다. 

 

샌 안토니오에서 가족들과 새로운 추억을 만든 것이 기쁘다. 다음에 한국에서 지인분들이 오시면 꼭 모시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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